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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순정 Jul 23. 2019

독립적으로 얹혀살기

12년 만의 친정살이... 변한 것과 변하지 않는 것

"학생! 학생!"

"네? 왜요?"


    고3 시절,

수업을 마치고 버스 정류장에 서서 집으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는데 누군가 손가락으로 등을 톡톡 두드린다. 뒤돌아보니 나이 지긋하신 아주머니 한 분이 미소를 지으며 서 있다.


"학생, 참 영이 맑네?"

"네? 뭐라고요?"

"식복도 타고났어."

"....?"

"그런데 아버지랑은 따로 사는 게 서로한테 좋아. 빨리 독립해."

"...."('뭐지... 점쟁이인가?')

"엄마한테 잘해야 돼. 알았지?"


    어디 가서 커피 한 잔 하며 더 이야기하자는 설득도 없고, 조상님께 정성을 들여야 한다는 이야기도 않고, 그녀는 그저 이 알쏭달쏭한 몇 마디만을 남기고 주저 없이 제 갈 길을 떠났다. 식복이 많다는 건... 먹을 복이 많다는 뜻인 것 같은데, 영이 맑다는 것은 도무지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아버지와 따로 사는 것이 좋다는 그녀의 말에는 흠칫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빠'는 우리 가족을 위해 밤낮없이 고된 일을 하셨고, 우리 네 남매를 사랑하고 아꼈음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요즘 애들 표현으로는 '꼰대' 딱지를 붙이기 딱 좋을 만큼 가부장적인 남자였다. 엄마를 가운데 놓고, 아빠와 나는 무수히 부딪혔다. 종갓집에 시집와 아이 넷을 키우면서 일 년에 수도 없이 얼굴도 모르는 이들의 제사상을 차리느라 허덕이고, 시아버지 수발 제대로 못 한다고 타박 듣는 힘없는 엄마를 볼 때마다 내 분노는 타올랐다. 그리고 그 목적지는 항상 이를 유발하고, 방조하고, 이에 모자라 가중시키는 그녀의 남편이자 내 아빠였다.

 

    '여자는 교사가 최고'라며 교대 갈 것을 종용하던 아빠의 권고를 여 보란 듯 무시하고 타 지역 대학교의 언론정보학과에 진학해 기숙사 생활을 하게 되면서 오랜 부녀 전쟁은 잠시 휴지기를 갖는 듯했다. 하지만 졸업 후 백수의 몸으로 '아빠 집'에 다시 들어가게 되면서 마찰은 다시 시작됐다. 지역 방송국에서 리포터, 구성작가 일을 하면서 방송국 공채 시험에 응시하는 등 나름 바쁘고 열심히 살았지만, 아빠가 생각하는 '월급 받는 번듯한 직장인'의 모습이 아니었다. 걱정 어린 공격은 그칠 줄을 몰랐다. '방송국은 아무나 들어가냐, 다 연줄 있고 힘 있는 사람들이 들어가는 거다, 너같이 평범한 애는 못 들어간다, 지금이라도 빨리 제대로 된 데(?) 취직해라!'


    아빠가 틀렸음을 증명하고야 말겠다는 오기는 집념과 끈기가 되었고, 결국 나는 졸업한 그 해가 다 가기 전에 공중파 방송국 기자 시험에 합격해 아빠와의 동거를 끝내는 데 성공했다. 나는 가부장적이고 숨 막히는 집을 박수받으며 탈출하게 되었고, 아빠 역시 당신 상식으로 불가능하리라고 생각했던 것을 이뤄낸 딸이 자랑거리가 되었으니, 부녀간의 애증 어린 오랜 다툼은 내가 집을 떠남으로써 두 사람 모두 행복한 승자로 만들고 마무리됐다.


그리고 나는 가끔씩 버스정류장의 그 여인을 생각했다.





    그로부터 꼭 12년 만에, 나는 다시 '아빠 집'으로 돌아왔다. 암환자가 된 채, 두 아이에 남편까지 데리고.


    한국에서 보낸 2주의 휴가가 끝날 무렵 내려진 암 진단은 우리 가족의 모든 일상을 순식간에 뿌리째 뒤흔들어 혼돈에 빠뜨렸다. 일단 미국으로 가는 비행기를 취소하는 것은 당연지사였지만, 이제 짐가방을 어디다 풀 것인지가 딜레마였다. 남편은 미국에 있는 회사로 돌아가야 하고, 나는 꽤 오랜 기간 동안 한국에서 치료를 받아야 할 것이고, 그러다 보면 또 아이들은 때때로 누군가 남의 손에 맡겨져야 할 터였다. 남편과 나는 둘 다 처음 겪어보는 정신적 충격과 부족한 정보에 안절부절못하며 방황하다 며칠의 고민과 암센터 간호사와의 상담 끝에 결국 친정에 베이스캠프를 꾸리기로 결정했다.


    '놀러'가 아니라 '살러'간 그 집은 할아버지가 더 이상 안 계시다는 것을 빼면 내가 떠나던 12년 전과 달라진 것이 거의 없었다. 세월이 흘러 세 동생도 모두 직장인이 되었지만 아무도 집을 떠나지 않았다. 그 집에 사는 이들은 다들 그대로인데 변한 건 나였다. 떠날 때는 혼자였는데 넷이 되어 돌아왔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는가. 조용하던 식사시간은 두 꼬마 덕에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를 아수라장이 되었고, 아랫집 할머니는 요즘 부쩍 위에서 쿵쿵거린다며 혹시 집에 운동기구를 들였냐며 엄마에게 점잖게 항의의 메시지를 전달했다. 그뿐인가, 여행가방에 들어가 있던 우리 식구 짐이 하나 둘 밖으로 나오고, 아이들 장난감까지 야금야금 늘어나면서 평화롭던 친정집은 빠르게 난민촌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남편과 나는 결국 '우리 식구 짐을 풀고 잠을 잘 곳'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조건은 단 하나. 친정으로 걸어서 밥 먹으러 갈 수 있을 정도로 가까울 것. 대중교통이 좋지 않고, 근처에 변변한 학교마저 없다는 주거 측면에서의 악조건은 그저 짐을 풀고 누울 자리만을 찾는 우리 가족에게 오히려 도움이 되었다. 10억을 어린아이도 아니고 아기 이름 부르듯 하는 서울과 시애틀의 미친 집값에 익숙해있던 우리는 친정집 인근의 아파트를 보증금 5000, 월세 40만 원에 계약하면서도 계속 소곤거렸다.

 "이거 진짜지? 너무 싼 거 아니야?"




       내가 한 사이클의 항암 치료를 마치고 병원에 머무는 동안 새 집과 친정을 오가며 아이들을 돌보던 남편은, 내가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미국에 있는 원래 우리 집으로 떠났다. '집'이라니! 불과 넉 달 전까지만 해도 존재조차 몰랐던 이곳을 어쩌다 집이라 부르게 되었을까. 그러고 보니, 남편과 나 둘 중 한 사람이 항상 부재하는 현재 우리 가족의 구성적 결핍은 잠은 자지만 요리는 하지 않는 이 집의 불완전한 쓰임새와 기묘하게도 닮아있다. 엄마 아빠의 보살핌을 다시 받고 싶어 친정으로 돌아왔지만 같이 부대끼는 것은 불편해 '숨 쉴 곳'을 따로 구한 나는 이 결핍 투성이 공간의 주인으로 부족함이 없으리라. 


    누구도 함부로 침범할 수 없는 온전한 '내 공간'이 주는 안정감은 사실 그 공간에서 얼마의 시간을 보냈는지와는 그다지 상관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 어느 장소든, 내가 마음을 주는 그 순간 '내 집'이 되며, 그 공간을 채우고 있는 따스하고도 심심한 공기는 그냥 들이마시는 것만으로도 마음을, 어쩌면 몸을 치유하는 영험함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병원에서는 얻지 못하는 또 다른 종류의 치유의 시간, 세간살이도 미처 다 갖추지 못한 이 미완의 공간에서 나는 얻고 있다.


    하품하듯 길게 늘어지는 나른한 오후 햇살을 만끽하며 아이들을 데리러 나섰다. 어린이집에서 신나게 하루를 보낸 꼬맹이들은 원 앞의 텃밭에서 잠시 나비를 쫓다 빨갛게 익은 방울토마토를 하나씩 따서 입에 넣었다. 친정집에 거의 당도하자 아이들이 조잘조잘 떠드는 소리를 들으셨는지 아빠와 엄마가 1층 현관까지 마중을 나오셨다. 이제는 일상이 된 3대가 함께하는 저녁식사. 병원에 머무르는 동안 항암제 부작용인 구토에 시달리느라 과일과 숭늉만 겨우 넘길 수 있었는데, 엄마 밥상을 보자마자 구역질은커녕 오랜만에 입맛이 돌았다.


"엄마, 이거 어떻게 한 거야? 맛있다. 애기들이 엄청 잘 먹네!"

"니 딸 아니고 내 딸 먹으라고 한 거거든? 애들 밥은 엄마가 먹일 테니 내버려두고 너나 많이 먹어."


    엄마의 퉁명스럽지만 솔직한 대답에 기분 좋게 배시시 웃으며 밥숟가락을 뜨다 문득 그 옛날 버스정류장의 그 여인이 한참만에 다시 생각났다. 12년 만에 다시, 아빠와 매일 같이 밥을 먹으며 사실상 같이 살기 시작했지만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싸우지 않는다. 그저 서로가 가슴 아프고 애틋할 뿐.


    그러고 보니 그동안 잊고 있었던 그녀의 또 다른 말들이 다시 떠올랐다.

나더러 식복이 있다고 그랬지. 또, 엄마한테 잘하라고도 했었다.


"엄마, 이렇게 매일 맛난 밥 차려줘서 고마워. 난 진짜 복받았어, 엄마 딸로 다 태어나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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