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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순정 Jun 23. 2019

어제와 오늘의 코딱지

좋은 건 나눠 먹어야지

   삼십 년쯤 지났으려나. 미취학 시절의 몇 안 되는 생생한 기억의 한 조각.


   충청북도 어딘가에 자리 잡았던 할머니 할아버지의 시골집에는 대청마루가 있었다. 어린 시절의 아빠와 할아버지가 직접 돌을 고이고 흙을 발라 지었다는 그 작은 한옥집은 명절이나 제사 때마다 엄마나 할머니 손을 잡고 숨이 깔딱이는 고개를 넘어야 다다를 수 있는 특별한 공간이었다.


   그 특별한 날 들 중 어느 하룻밤, 빠와 나와 세 살 아래 여동생은 대청 마루 위에 이불을 덮고 나란히 누워 있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 미처 차지 못한 달덩이가 덩그러니 빛나고 있었다. 전설의 고향에 나올 법한 한 밤중의 새 울음소리, 구슬픈 풀벌레 소리를 감상하며 한낮의 햇볕 냄새가 아직까지 스며있는 이불을 턱 끝까지 끌어당겼다. 포근한 이불의 감촉, 얼굴을 간질이는 서늘하지만 상쾌한 밤공기. 며시 기분 좋은 잠 속으로 빠져들려던 그 무렵.


"아빠, 아빠!"


잠들었는 줄 알았던 여동생이 소곤소곤 아빠를 불렀다.


"응...  왜?"

"아빠, 나 코딱지!"

"코...  코딱지?"

"응! 왕딱지!"

"......"


   어둠이 짙어 미처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그 표정이 자못 진지하고 자랑스러웠을 것은 지금 생각해봐도 의심할 여지가 없다.


   휴지로 닦아주면 그만일 하찮은 일인데 손이 닿는 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곤하게 단잠을 자다 갑자기 코딱지 날벼락에 깨워진 젊은 아버지는 엉뚱한 수를 냈다.


"아빠는 코딱지 파면 어떻게 하는 줄 알아?"

"어떠케?

"먹는 거야. 이렇게."


 그는 진짜로 코딱지를 파는 것처럼 팔을 움직이는 시늉을 하고 얌얌얌 씹는 소리까지 꾸며냈다.


"아 맛있다!"

"나도 나도 먹을래!"


  속여먹기 딱 좋은 세 살 배기는  아빠의 더러운(?) 꾀에 넘어갔고, 조금 더 인생을 알았던 나는 내일 이 사건을 온 가족에 일러바칠 생각에 어둠 속에서 키득키득 숨죽여 웃었더랬다.


ㅡㅡㅡㅡㅡㅡ



   그로부터 수십 년이 지난 지금.


   자신이 창조해낸 피조물을 스스로의 힘으로 발굴하고, 이에 대해 성취감과 자랑스러움을 가지는 것은 내 어린이도 예외가 아니었다.


"엄마! 코딱지!"

"이리 갖고와."

"먹?(먹어볼까?)"

"아냐 그거 먹는 거 아니야. 이리 줘 닦아줄게."


   코딱지 먹는 건 도대체 어디서 배웠는지, 설마 외할아버지는 아니겠지? 하는 생각에 피식하고 건성으로 응대하는 현직 엄마와 달리 본인 아이 넷을 키워낸 전직 엄마이자 현직 외할머니는 기겁을 해댔다.


"코딱지 먹는 거 아냐, 지지! 지지! 더러워!"


   뭔가 재미있는 할머니의 약점을 얻었다 싶은 꼬마는 검지손가락을 자랑스럽게 세운 채 짓궂은 웃음을 지으며 도망을 다니기 시작했고, 할머니가 추격을 포기했을 무렵 쪼르르 달려와 놀리듯 이야기했다.


"먹어떠!"


ㅡㅡㅡㅡㅡㅡㅡㅡㅡ

  코딱지 추격전이 벌어지기를 며칠, 친정 엄마와 차를 타고 이동하려는데 시동을 켜자 웬일로 평소 듣지도 않던 라디오가 틀어져 있었다. 심지어 뉴스도 아닌 생활정보 프로그램.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흘러나오는 방송을 건성으로 듣고 있는데


"국제 저명 학술지에 소개된 논문에 따르면, 코딱지를 먹으면 면역력 향상에 도움이 되는 것으로..."


   

   라는 믿지 못할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자동차에 나란히 앉아있던 두 모녀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배를 움켜쥐고 폭소를 쏟아냈다. 엄마는 거의 흐느끼다시피 웃으며 내 어깨를 두드렸다.


"코딱지 먹어도 되겠네! 너 엄청 많이 먹어야겠다!!!"


  갑작스러운 엄마와 외할머니의 웃음 대잔치에 뒷자리에 앉아 있던 우리의 소중한(!) 면역력 공급원은 영문도 모르고 까르륵대며 더 신나했다. 이후 그녀의 발굴작업에 대한 엄마와 할머니의 대접은 하늘과 땅 차이로 바뀌고 말았다.


"함미, 코딱지!"


"엄마 갖다 줘. 엄마 지금 많이 아야 하니까 빨리 나으려면 좋은 거 많이 먹어야 돼."


"엄마, 코딱지!"


"아냐 아냐, 할머니 드시라고 해. 재이 돌봐주느라 힘드시니까 힘내야 돼, 할미 드려!"



   요 영악한 꼬맹이는 할머니와 엄마가 더 이상 자신의 수확물을 두려워하지 않고 수취인 없는 배달을 계속 시킨다는 사실을 곧 간파해버렸다.


   따라서 이 사건 이후 코딱지 자랑질을 멈추고 다섯 살 먹은 제 오빠처럼 스스로 휴지에 닦아서 쓰레기통에 버리기를 시작했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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