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괜찮습니다. 양쪽 가슴을 도려냈지만, 괜찮습니다. 탐스럽던 머리카락이 하나 둘 뽑혀나가 민머리만 남았어도 괜찮습니다. 살아 있으니까요. 살아 있기에 내 목숨보다 소중한 꼬마들과 눈을 맞추고, 양 팔로 힘껏 안아주고, 입술로 사랑한다 백 번, 천 번 말해줄 수 있으니까요. 그깟 가슴, 그깟 머리카락 잃어도 저는 괜찮습니다.
저는 괜찮습니다. 닿기만 해도 피부가 괴사 된다는 독성 항암제를 투여하느라 혈관이 시커멓게 타 버리고, 이곳저곳 주삿바늘과 멍으로 흉하게 변해버린 팔뚝이 부끄럽지만, 괜찮습니다. 치료를 받을 수 있으니까요. 하루하루 견뎌내다 보면 언젠가는 이 여정도 끝이 나고 다시 건강해질 수 있다는 희망이 있으니까 저는 괜찮습니다.
저는 괜찮습니다. 밀려오는 구토로 밥 한 술 뜨기도 힘들고, 현기증으로 며칠을 병실 침대에서 꼼짝 할 수 없어도 저는 괜찮습니다. 혼자 견뎌내면 되니까요. 이 못난 모습, 보면 아파할 사람들에게 안 보여도 되니까요. 내 사랑하는 가족들이 나 대신 내 아이들 곁을 지켜줄 수 있으니 저는 혼자 있어도 괜찮습니다.
저는 괜찮습니다. 입 안을 가득 뒤덮은 궤양으로 무엇을 입에 넣어도 모래알을 씹는 듯하고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해도 숨이 가쁘지만 저는 괜찮습니다. 그래도 집에 돌아와 아이들을 다시 만날 수 있으니까요. 마스크 쓰고 집 앞 공원 산책이 다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또 헤어져야 하지만 그래도 지금 함께할 수 있으니까요.
저는 괜찮았습니다. "괜찮냐"라고 묻는 그 전화를 받기 전 까지는. 한때 믿었고, 따랐고, 존경했던 그 선배는 내 '괜찮음'을 취재하듯 짧게 확인한 뒤, 나로 인한 회사 인력사정의 '괜찮지 않음'을 논했습니다. 인사치레로 하는 걱정의 인사말도 단 한마디 없이 바로 던지는 돌멩이에 그야말로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습니다.
정말로 사랑했고, 젊은 날을 바쳤던 내 회사에서 아이 둘을 낳고 삼 년의 육아휴직을 하는 동안 저는 죄인으로 변해 있었습니다. 아무도 죄인이라 직접 손가락질을 하지는 않았지만, 저는 항상 죄인인 양 미안했고, 그것은 조직에서도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암 진단을 받고도 이 소식을 알리기 가장 힘들었던 상대는 친정엄마가 아닌 회사였습니다. 병휴직이라는 새로 짓게 된 죄는 양쪽 가슴에 자리 잡은 암덩이 이상으로 제 마음을 짓눌렀습니다.
암덩이는 수술로 도려냈는데 이 영문 모를 죄스러움은 암세포보다 더 집요하게 심장을 조여오며 마음에 생채기를 냅니다. 죄를 지은 것이 없는데 죄책감을 느껴야 하는 사실이 서럽고 억울합니다. 나는 아무것도 잘못한 것이 없는데, 그저 남들 하듯이 엄마가 되었을 뿐이고, 운이 나빠 병에 걸렸는데, 그래서 힘들어 죽겠는데 왜 내가 죄인이 되어야 할까. 이 선배는 내게 무슨 대답이 듣고 싶어 이 밤중에 이런 전화를 했을까. 더 이상 통화를 이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괜찮다"는 말로 그동안 꾹꾹 눌러 놓았던 온갖 감정이 터져 나와 처음으로 숨죽이지 않고 소리 내어 엉엉 울었습니다. 세 살, 다섯 살. 엄마가 오랜만에 집에 와서 마냥 좋았던 두 아이는 영문도 모르고 더욱 서럽게 따라 울었습니다.
"그래도, 괜찮습니다"
왜냐하면 이 말은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두려움과 고뇌를 마취시키는 진통제이기도, 믿으면 이뤄질 거라 믿으며 고대하고 염원하는 하나의 신앙이기도 하니까요. 그러니 저에게 더 이상, 괜찮냐고 물어보지 말아 주세요. 저는 앞으로도 괜찮겠지만 그 답은 당신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나는 이 글을 페이스북에 올림으로써 공식적으로 '암밍아웃'을 했다. 남편도 미국으로 떠나고 없던 문제의 그날 밤 나는 불 꺼진 거실에서 짐승처럼 소리 내어 울면서 밤을 지새웠고, 해가 떠오를 무렵까지 가슴을 치며 이 글을 썼다, 아니 토해냈다. 가슴 깊숙이 체기처럼 꽉 막혀있던 서러움을 토악질하듯 뱉어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당장 가슴이 터져버릴 것 같았다.
비단 그 선배 때문만은 아니었다. 괜찮지 않은데 무수히 쏟아지는 "괜찮냐"는 질문들에 조금씩 조금씩 생채기가 나고 있었고, 여기에 "괜찮다"라고 답하며 누가 시키지도 않은 씩씩한 척을 미련하게 반복하면서 마음의 상처는 더 깊어져 갔다. 마치 공기도 안 통하게 꽁꽁 싸맨 상처가 안에서 점점 곪아가듯이.
충격적인 뉴스를 충동적으로 던져놓고 살짝 후회가 밀려왔다. 너무 감정적이었고, 성급했고, 무엇보다도 아름답거나 자랑스럽지 않은 이야기였다. 사실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에 이따금씩 근황을 올려오곤 했지만, 암 진단을 받고 반강제적으로 한국살이를 다시 시작한 이후로는 거의 중단한 터였다. 다들 미국에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한국에서 방문한 곳들의 사진을 올리거나 하면 귀국했냐는 댓글이 달릴 것이 뻔하고, 거기에 사실을 털어놓기도, 그렇다고 거짓으로 얼버무리기도 애매한 상황이 아닌가. 결국 본의 아니게 한국에 들어왔으면서도 이를 알리지 않고 숨어 사는 형국이 된 지 오래였다.
하지만 곧, 이런저런 나의 감정들은 모두 기우였음이 드러났다. 많은 사람들의 걱정과 응원의 메시지가 차곡차곡 날아와 쌓여갔다. 몇 년 동안 연락을 주고받지 못했던 친구들, 한 때 출입처에서 만나 인연을 맺었던 사람들로부터 진심이 깃든 편지와 선물들이 도착했고, 이 가슴 벅찬 위로들은 그동안 생채기 났던 가슴을 순식간에 아물게 만들었다. 무엇보다도, 더 이상 아무것도 숨길 필요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