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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순정 Jun 19. 2019

외간 남자 옆에서 요강 쓰기

환자복을 입고 자발적으로 인권을 반납하다

   "병실 배정되셨습니다. 6인실이에요. 오늘 세시까지 입원하실 수 있으신가요?"


    유방암 수술을 위해 입원하기로 되어있던 날 아침, 병원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의료보험 혜택도 받을 수 있고 뭔가 더 쾌적할듯한 2인실을 희망했었지만 인생은 원래 뜻대로 돌아가지 않는 법. 그쯤은 이미 알고 있다. 다만 입원기간 동안 잠은 다 잤구나 하는 생각에 서글퍼질 뿐.


    나는 이른바 '프로 불편러'이다.

직업병도 있겠지만, 어딜 가든 무엇을 하든 본능적으로 불평할 거리를 찾아 눈을 번뜩이는 피곤한 인물이다. 혈기 왕성한 20대 시절에는 이 성질머리 때문에 많이 싸우고 따지고 다녔더랬다. '쌈닭', '피곤한 애', '독한 년' 정도의 수식어가 항시 따라다녔고, 대상의 나이와 지위에 대한 배려조차 잊을 때가 많아 '싹수없는 년'으로 불리는 경우도 간혹 있었다.


    신기한 점은, 시간이 흐르고 또 두 아이를 키우고 하다 보니 이 메마른 장작 같던 싹퉁머리에도 '관용'과 '인내'라는 것이 싹트게 되었다는 점이다. 참아주고, 이해하고, 가끔은 손해도 좀 보고 하는 것들이 영 의미 없는 짓은 아니라는 것을 조금씩 경험을 통해 배워가고 있는 중이지만, 그렇다고 이 '불편러'의 감각도 사라지는 건 아니다. 결과적으로, 불편함을 느끼지만 마구 불평을 하지 못해 내면의 스트레스가 쌓여가는 부작용을 겪게 되었다.

   

    짐가방을 끌고 들어선 암센터의 6인 병실에는 왼쪽에 세 개, 오른쪽에 세 개의 침상이 나란히 놓여있었다. 환자마다 배정된 주치의 이름을 대충 훑어보니 모두 유방암 환자들인 듯했다. 창가 자리를 차지하는 사소하고 기쁜 요행 따위는 언제나 나의 것이 아니므로 기대도 하지 않았지만 역시나 가운데 침상 당첨이다. 커튼을 둘러치자 서너 평 남짓의 자그마한 개인 공간이 만들어진다. 좁아도 너무 좁다.


    말이 6인실이지 각 침상마다 보호자가 적어도 한 명씩 상주하니 실제 거주 인원은 열둘이다. 규정상 상주 보호자는 한 명만 출입이 허용되지만 보호자용 출입 카드는 두 장이 주어지는 덕에 면회 시간이 아니더라도 낮 시간의 인구밀도는 더 높아지는데 모두들 커튼을 닫아 둔 채 생활하다 보니 개인 공간을 가지고 있지만 병실의 모든 사람들과 모든 대화를 공유하는 기이한 분위가 만들어진다.

고로, 사생활 존중은 없다.


"여보, 노트북 갖고 왔지? 킹덤 인가 그거 볼까? 재미있다던데..."

"오 그래그래. 근데 넷플릭스 이거 유료 아니야?"

"아냐 가입하면 한 달 무료야. 근데 나는 이미 무료체험 썼어. 자기 걸로 하나 더 만들자."


    커튼에 둘러싸인 덕에 잠시 우리끼리만 있는 듯한 착각에 빠져 소리를 죽이지 않고 나눈 이 대화는 병실의 모든 사람들을 넷플릭스로 대동 단결하게 만들었다.


"한 달 무료체험 맞네, 한 달 뒤 알람 설정해놔. 돈 나가기 전에 해지하게."

"킹덤? 그게 재미있대? 아 뭐야 좀비잖아. 나 이런 거 별론데..."

"넷플릭스? 그게 뭐야? 거기 전국 노래자랑도 나오냐?"


    이 침대 저 침대에서 말풍선이 하나씩 올라올 때마다 남편과 눈빛을 교환하며 소리 죽여 킥킥거렸다. 우리의 대화를 다들 조용히 귀 기울여 듣고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같이 대화를 나눈 듯 안 나누며 이야기를 공유하는 이 커뮤니케이션 아닌듯한 커뮤니케이션 방식은 요즘 유행하는 말처럼 웃기고 서글펐다.


    빼앗긴 것은 사생활뿐만이 아니었다. 깊은 밤이 되자 이 침대, 저 침대에서 울려 퍼지는 코골이 소리는 생전 경험해 보지 못한 새로운 차원의 것이어서 도저히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대학생 때 MT 이후로 이렇게 많은 성인 남성들과 한 공간에서 잠을 자 본 경험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없다. 사실 MT 때는 항상 만취해서 어떻게 잠이 들었는지도 모른 채 아침을 맞이했으니 남의 코 고는 소리를 신경 썼을 리도 만무하다.


    안타깝게도 최고 음량을 자랑하는 악기(?)는 내 아버지뻘 연배로 추정되는 바로 옆 침상의 보호자였다. 커튼 하나를 사이에 두고 지척에 누워 있을 그분. 커튼 너머로 팔을 뻗으면 닿을 거리에 있는 그분.


    커튼 틈새로 팔을 밀어 넣고 더듬더듬 얼굴을 찾는다. 까칠까칠한 수염이 만져진다. 잠시 망설이다 단단히 마음을 먹고 숨을 들이쉴 타이밍에 엄지와 검지 손가락으로 살짝 코를 꼬집는다. 1초, 2초, 3초. "큭" 작은 파열음과 함께 작업 대상이 옆으로 돌아 누우며 상황은 종료된다. -> "라는 상상도 본다."


    상상을 실행에 옮기고픈 충동을 억누르려 노력하다 어느 순간 까무룩 잠이 들었나 보다. 수액줄을 확인하러 온 간호사가 남편과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에 눈이 떠졌다. 시계를 보니 새벽 다섯 시. 남편의 손에는 요강... 아니 좌식 소변기가 들려 있다. 세 살 된 둘째에게 배변 훈련시키려고 사 준 아기 변기랑 비슷하게 생겼구나. 그런데 이걸 왜?


"환자분 소변줄 뺐으니까 오늘 첫 소변 여기다 보시고 보호자분은 몇 밀리 나왔는지 간호사실에 알려주세요."

"저 화장실 갈 수 있는데요?"

"소변 양을 재야 해요. 낙상 위험 있으니까 화장실 가지 마시고 여기서 보세요. 보호자분이 도와주시고요."

"......"


    침대 양 쪽으로 커튼 한 장을 사이에 두고 두 명의 모르는 아저씨들이 손 대면 닿을 거리에 누워있는데 바지를 내리고 오줌을 누라는 요구는 그야말로 경악스러웠다. 환자는 인권도 없는가. 하지만 잠이 덜 깬 탓인지, 아니면 건강을 담보 잡힌 대가로 양처럼 순해진 탓인지 반항은 하지 못한다.


    '거사'를 치르기로 결심했지만 새벽의 병실은 너무 조용했다. 모기가 딸꾹질을 해도 들릴 지경이었다. 밤새 잠 못 이루게 만들던 그 야속한 코 고는 소리들을 다시 소환하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오빠, 말 좀 해봐."

"무슨 말?"

"그냥 아무거나. 어디 전화할 데 없어? 전화라도 좀 해. 노래를 좀 불러 보던가. 소음을 좀 만들라고!"


이 애절한 고분고분함 이라니!

프로 불편러 감수성은 아마도 이미 진작에 암세포에 의해 사멸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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