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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순정 Jun 17. 2019

손님, 이건 고준희예요

항암 탈모에 대처하는 자세


    "어서 오세요, 뭐 하실 건가요?"

    "네 염색 좀 하려고요."


    저희 미용실 처음 오셨냐, 원하는 디자이너는 있으시냐. 아니다 처음이다, 빨리 해 줄 수 있는 분으로 해 달라. 마실 것 좀 하시겠느냐, 아이스커피 주시면 감사히 마시겠다. 뭐 이런 매번 똑같이 흘러가는 대화 패턴 끝에 그녀가 묻는다.


    "어떤 색상으로 하시겠어요?"

    "이렇게요."


    내 휴대전화 액정 화면에는 노랗게 물들인 쇼트커트 머리를 한 고준희가 상큼하게 웃고 있었다. 이 주 전, 유방암 절제 수술을 받은 뒤 퇴원하자마자 치렁치렁하던 긴 머리를 쇼트커트로 자를 때 미용실에 들고 갔던 것과 같은 사진이다.


   항암 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사실이 확실해진 뒤 공들여 기른 긴 머리가 갑자기 귀찮아지기 시작했던 터였다. 샤워할 때마다 배수구 막히는 것도 짜증 나고, 아이들과 같이 뒹구는 이불속에서 머리카락 주워 모으는 것도 견딜 수 없이 귀찮아졌다. 앞으로 맞이하게 될 강제적 민머리에 대비해 충격을 조금 완화시키고자 하는 본능적인 방어기제가 작용했는지도 모른다.


  이유야 어찌 됐든, 나는 그렇게 쉽게, 충동적으로 긴 머리를 싹둑 잘라버렸고, 뭐가 부족했는지 이 주 만에 또 염색을 하겠다며 다른 미용실 의자에 앉아있는 것이었다.


    20대 중, 후반으로 보이는 앳된 미용사에게 사진을 보여주고 나서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이 아줌마 지금 진심인가?' 그녀의 마음속 외침이 들리는 듯했다. 아니 내가 고준희 얼굴을 만들어 달라는 것도 아니고 그냥 머리 색깔 좀 비슷하게 해 달라는데 이 반응은 무엇인가.


    "이거 굉장히 밝은 색상인데 한번 염색으로는 이렇게 안 나와요."

    "네, 탈색해야 되죠? 알아요. 해주세요"

    "이게 사진은 조명이나 빛 때문에 분위기가 왜곡되는 경우가 많은데, 실제로 보면 정말 밝아요."

    "네 괜찮아요."

    "그런데 굳이 탈색을 하셔야겠어요?"

    "탈색이 아니라 이 머리가 하고 싶은 거죠. 탈색 안 해도 색이 잘 나오면 더 좋겠죠?"


    이쯤 되면 이 여자는 나에게 시술을 해 주기가 싫은 게 분명했다. 내가 주제도 모르고 고준희 사진을 가져와서 기분이 상했는지, 아니면 사십 가까워오는 아줌마가 뭐에 홀려서 노란 머리 한다는데 나중에 후회하고 사회생활에 문제 생길까 걱정이 되었는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녀는 "못 해 드려요"라는 표현만을 교묘하게 피해 나의 의지를 꺾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염색을 한 뒤 샴푸를 하면 나중에 색깔이 점점 더 밝아지니 한 톤 낮추는 게 좋겠다며 마지막 공격을 펼치는 그녀에게 미소를 지으며 단호하게 반격했다.


    "아니오, 지금 충분히 밝게 해 주세요." (제 머리카락에는 '나중'이 없거든요)


    머리카락에 염색제가 발라지는 동안 책을 꺼내 들었다. 아등바등 살지 말고 삶을 우주의 흐름에 맡기면 더 많이 이룰 수 있다는 내용을 읽으며 생각해본다. 내가 흘러가게 둘 것은 무엇이고 그래서 얻어질 것은 무엇인가. 흘러가게 둘 새도 없이 남들이 호시탐탐 노리다 득달같이 주워가 버리는 이 치열한 시대에 너무 순진한 생각 아닐까. 암환자가 된 뒤 얻어진 약간의 관조적 정서와 원래 충만하던 삐딱이 정서가 생각의 꼬리를 물고 있는 도중 엄마에게서 전화가 온다.


    "뭐 하고 있어? 애들 어린이집 잘 갔어?"

    "잘 갔지. 지금 미용실."

    "미용실? 미용실은 왜?"

    "염색 좀 하게"

    "머리 빠질 건데 염색을 왜 해?"

    "어차피 다 빠질 머리니까 겁 없이 이것저것 해 보는겨. 이럴 때 노랑머리도 한 번 해보고 그러는 거지."

    "그 말도 맞네."


   살벌한 주제를 낄낄대며 한없이 가볍게 승화시킨 대화를 마치고 내 머리에 염색약을 바르고 있는 그녀를 쳐다본다. 못 들은 척 하지만 당연히 들었으리라. 이 아줌마는 지금 뭔 소리를 하는 건 가 어리둥절한 표정이다. 미용실에 들고 간 또 다른 암 치료 관련 서적을 들춰보다 힐끔힐끔 머리 색깔을 살핀다. 음... 너무 밝아지는 것 같은데? 어린이집 등원시킬 수 있을까? 슬그머니 걱정이 올라온다.


    "샴푸 하실게요."


    머리를 감고 말리는 과정이 제법 두근두근 하다. 나는 어떤 모습으로 변해있을까?


 '착한 아이'로만 살아왔던 인생에 짱돌이 좀 던져지려나?


 이제 와서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 싶지만, 암환자가 된 지금은 시도할 수 있는 모든 새로운 경험과 선택에서 살아갈 의미를 찾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야 혹시 올지 모르지만 결코 와서는 안 될 그 순간에 삶에 대한 본전 생각에 억울하지 않을 테니까.


    그래서, 이번 회차 작은 일탈의 결과는?


    상상했던 파격은 없었고, 적당히 세련된 밝은 갈색 머리의 30대 중반 아줌마가 거울을 응시하고 있다. 일탈은 실패했지만 무언가 안도스러웠고, 의외로 잘 어울려서 컴플레인은 접어두기로 한다. 별로 비싸지도 않은 금액을 지불하고 난 뒤 계단을 내려오며 두 시간 전 연습했으나 차마 내뱉지 못했던 멘트를 입 속으로 웅얼거렸다.


    '저 암환자인데요, 앞으로 2-3주 뒤면 머리카락 다 빠질 거니까 그전에 노랑머리 한 번 해 보게, 해 달라는대로 좀 해 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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