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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순정 Jun 17. 2019

나 암 이래, 어떡하지?

희대의 반전 드라마

    모든 드라마에는 양념이 필요하다. 양념을 치는 방식은 무궁무진하다. 클라이맥스가 될 수도 있고, 반전이 될 수도 있고, 무언가 구덩이를 파던 덫을 놓던 수작을 부려 편평하고 맨송맨송한 이야기에 긴장감을 불어넣는다. 왜냐? 그래야 재미있으니까. 안 그러면 재미없으니까.


    내 인생이 그랬나 보다. 나에게는 매 순간이 스펙터클하고 거대했는데, 누군가에게는 하릴없이 맨질맨질해 보였을지도 모른다. 남들이 우러러보는 데다 육아휴직까지 턱턱 잘 내주는 좋은 직장 있겠다, 남편 직장 따라 미국 살이 하면서 애들 영어 공부시킬 기회도 얻고, 얼마나 머물지는 몰라도 남의 집 살이 그만하고 이쁜 보금자리 꾸며보자며 겁 없이 남의 나라에 집도 샀다.  갓난쟁이 어느 정도 키워 놨으니 이제 대학원도 가 보겠다네? 참 좋은 팔자입니다 그려.


   하지만 어이없게도, 잠시나마 소위 '사기캐' 같던 내 장밋빛 인생은 그 찰나의 만족감이 민망스러울 정도로 너무나 갑자기 비극으로 장르를 급 선회해버렸다. 왜 드라마나 영화 보면 그런 장면 자주 나오지 않나, 행복하던 주인공에게 예기치 않게 전해지는 한 마디.


 "백혈병입니다."


    내 드라마도 대충 비슷했다. 백혈병 아니고 '암'이라는 것만 조금 다를 뿐. 


    동생 결혼식을 맞아 일 년 반 만에 찾은 한국 일정은 바쁘다는 말 로도 표현이 되지 않았다. 술 약속을 줄 세워 전투하듯 해치우다 겨우 하루 짬 내어 받은 건강검진. 그동안 애 둘 연달아 낳고 키운다는 핑계로 건강검진도 제 때 안 받았으니 돈 좀 들여볼까 싶어 무심코 추가한 유방 초음파에서 전문의 명찰을 단 그녀는 내 가슴에 양성 혹이 하나 있으니 시간 될 때 시술을 받으라 말했다. 간단한 시술이고, 압박붕대를 해야 하니 이왕이면 날이 선선할 때 하는 것이 좋겠다는 조언도 곁들였다.


    이미 이 주간의 일정이 빽빽하게 정해져 있는 터, 간단하다는 시술은 자연스럽게 '날이 선선한' 가을로 미뤄질 판이었다. 하지만 남편은 언제 다시 한국을 방문할지 모르니 병 키우지 말고 다녀오라며 숙취로 겔겔대는 게으른 몸뚱이를 새벽부터 깨워서 내보냈다. 술냄새를 폴폴 풍기며 건강검진을 했던 선릉역 어딘가의 유방외과에 들어가 말했다. 건강검진에서 양성 혹이 있다던데 맘모톰으로 제거하고 싶다고. 웃옷을 갈아입은 뒤 어두컴컴한 방으로 안내받았다. 초음파 화면을 들여다보던 담당의사는 무서우리만치 직설적이었다.


    "환자분 이거 오늘 못 떼세요. 조직검사하셔야 합니다. 모양이 안 좋아요. 암일 수 있어요."


    공기가 묘하게 달라져 있었다. 미간에 깊은 주름을 내며 화면을 응시하는 의사의 굳은 표정, 마스크를 쓴 채 서로 눈빛을 주고받는 간호사들. 가슴에 마취 주사를 놓고, 기다란 바늘을 집어넣어 조직을 채취하는 과정이 순식간에 지나가고 간호사 한 명이 지혈을 해야 한다며 바늘이 들어갔던 가슴 한쪽을 꾹 눌러준다. 어떤 경우에 모양이 안 좋다고 말하는지 물어보자 간호사는 혹의 모양이 동그랗게 똑 떨어지지 않고 뿔이 난 듯 '지저분하면' 모양이 안 좋은 거라고 대답해준다. 화면에서 보였던 내 혹의 모양을 떠올려본다. 몹시 지저분했다.


    지혈을 마치고, 옷을 갈아입고 수납을 마치자 상담 실장인듯한 중년의 여자가 다른 방으로 안내한다. 결과는 이틀 뒤면 나온다고, 혹시 3차 병원으로 의뢰를 해야 하는 상황이면 오전 중에 해야 예약이 빨리 잡힌다며 가급적이면 아침 일찍 결과를 들으러 오는 것이 좋을 듯한데 몇 시쯤 오실 수 있냐고 묻는다. 아, 이들은 이미 초음파 사진만 보고도 결론을 내렸구나. 나 암이겠구나. 서서히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이틀 뒤, 결과는 예상대로였다. 침윤성 유방암. 암을 뜻하는 질병분류기호 C 코드가 적힌 진단서를 받아 들고 남편과 병원 옆 커피숍에 자리를 잡았다. 내 시계는 딱 멈춰섰고, 그의 시계는 그 어느 때보다 바쁘고 긴박하게 돌아갔다. 그는 우리가 다음 날 타기로 예정되어 있던 미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표를 취소했고, 회사에 전화를 걸어 며칠 휴가를 쓰겠노라고 이야기했고, 불과 몇 시간 전 작별 인사를 나눈 어머니께 다시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울었다. 수화기 너머로 어머니의 울음소리도 들려왔다. 나는 우리 엄마에게 전화를 걸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 누구에게도 말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저 말없이 커피를 홀짝이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애처롭게도, 암 환자가 된 나는 당장 갈 곳이 없었다. 내 집으로 돌아가는 티켓은 취소됐고, 시댁, 친정, 호텔, 그 어디도 가고 싶지 않았다. 갈 수가 없었다. 비행기표와 함께 마치 내 미래가 취소되기라도 한 듯, 생전 느껴보지 못한 공포감과 상실감에 그냥, 공기 중으로 사라져 버리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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