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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순정 Jul 01. 2019

샤넬보단 샤오미

집 나간 물욕을 찾습니다

"자기야, 자기는 스스로에게 선물 같은 거 해 본 적 있어?"


    항암 치료 후 머물던 요양병원.

옆 침대를 쓰는 언니(물론 혈연관계는 아니다)가 고개를 빼꼼 내밀고 질문을 던졌다.


"선물이요?"

"왜, 그런 거 있잖아 올 한 해 수고한 나를 위해 셀프 선물 주고 뭐 그런 거. 자기가 젊고, 직장생활도 오래 했다니까 한번 물어보는 거야. 좀 전에 통화한 친구가 아프느라 힘든데 셀프 선물이라도 하나 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 그래길래... 나도 진단금 받은 걸로 좀 해볼까? ㅎㅎ"


    셀프 선물!


    실로 오랜만에 듣는 이 추억의 단어가 귀에 꽂히자마자, 집을 나간 지 너무나도 오래돼 생사조차 불명이었던 오랜 친구 '물욕이'가 슬그머니 기어 들어와 머릿속 한편에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말 설고 물 선 이국 땅에서 도움받을 이 하나 없이 아기 둘 키우고 밥하고 청소하고 공부까지 하느라 잘 챙겨주지 못했더니 삐쳤는지 아니면 상처를 받았는지 어느 순간 훅 사라져 버렸던 그 아이가 말이다.


     "까똑!"

[안녕하십니까?

귀하의 보험계약과 관련하여

청구하신 보험금이

처리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00 생명]


    두 곳의 보험사로부터 얼마 전 신청한 암 진단금이 지급되었다는 문자가 도착하자, '물욕이'는 더욱 기세가 등등해졌다.


'사야 해! 사야 해! 너는 무언가를 사야 해! 가방 안 산지 한참 됐잖아!

언제 죽을지 모르는 인생, 돈도 충분히 있는데 하나 못 지를 건 뭐야?'


    그렇다, 이 친구의 말이 맞다. 이미 충분히 깨닫지 않았는가? 인생은 한 치 앞을 모른다는 것을.

하고 싶은 일을 나중으로 미루는 것은 정말 어리석은 짓이다. 나중이 언제 올 줄 알고? 계획이 아무리 거창하고 그것을 미루는 이유가 아무리 타당해도, 이행을 하지 않으면 변화는 없다. 그냥, 아무것도 안 하는 것과 똑같은 것이다.


     '내일'의 상황은 절대로 나의 예측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심지어 아예 안 올 수도 있다. 나 스스로가 가장 잘 알고 있지 않은가? 불과 두 달 전까지만 해도 상상도 못 했었다. 삼십 대 중반의 나이에 영화에서나 보던 암 환자가 되어 민둥머리에 환자복을 입은 채 변기통을 붙잡고 토악질을 하며 찔찔거리고 있을 오늘의 내 모습을.


    '셀프 선물'을 무엇이든 하기로 결심하자 이번에는 비루한 건강과 외모 상태가 묻는다.


'괜찮겠어?'


    냉정히 따져보니 사실 괜찮지 않다. 한 달의 반 절은 병원에서 보내는 환자 신세, 나머지 반 절은 집에 돌아가서 지낸다 하더라도 아이들 어린이집 등 하원이나 시키고, 외출이라고는 마스크 쓰고 벌벌 떨며 마트 가는 것이 전부인 주제에. 심지어, 사 두기만 하고 몇 번 꺼내지도 못한 채 상자에 먼지만 쌓여가는 다른 '아이들'도 있지 않은가. 몇 년 전 아웃렛에서 100불 남짓 주고 산 검은색 토리버치 크로스백을 몸에 꿰맨 듯 벗지 못하는 것은 내가 이 아이를 특별히 애정 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내가 처한 상황 때문임을 잊었던가?

 

    가방은 아무래도 아닌 것 같다는 결론에 이르자마자 '물욕이'가 다시 튀어나와 옆구리를 쿡쿡 찌른다.


'그럼 시계는 어때? 예전에 굿 와이프 보면서 전도연이 샤넬 보이프렌드 찬 거 보고 예쁘다고 그러지 않았어?'

'뭔 소리야, 그게 얼만데! '

'잘 생각해봐, 가방은 매일 들지도 못하고 유행도 타지만 시계는 아니잖아. 항상 차는 거고, 유행도 안 타고.'

'그건 그렇긴 하다. 그래도 너무 비싸.'

'그럼 까르띠에 탱크 솔로 어때?'

'그것도... 예쁘긴 하지.'

'휴대폰 계속 들고 다니지 말고 차라리 시계를 차. 휴대폰 계속 들여다보느라 손목도 아프다며!'


    손목시계를 하나 사야겠다는 생각은 그렇지 않아도 얼마 전부터 하고 있던 터였다. 수시로 시간을 확인하는 습관이 있어 항시 손 닿는 곳에 휴대폰을 두는데, 침대에서 보내는 시간이 길어지다 보니 특별히 하는 일 없이 휴대폰만 들여다보게 되어 무언가 특단의 조치가 필요했다.


    절반은 필요에 의해, 절반은 물욕에 휩쓸려 어떤 시계를 사야 하나 네이버를 떠돌아다니다 보니 피트니스 기능이 강화된 스마트워치가 눈에 들어온다. 오호라! 환자가 되고 난 뒤, 운동이 시간이 남아 하는 취미가 아닌 생존수단으로 떠오르면서 하루 만보 걷기를 실천하던 와중이라 더 흥미가 갔다. 운동량, 심박수를 체크하고 운동 정보를 수집해 준다는 기능이 마음에 든다. 갤럭시 기어나 애플 워치가 대세인 듯한데... 제조사도, 종류도 다양한 수많은 제품을 들여다보려니 조금 피곤해진다.


     기능은 끌리는데 그렇다고 가격도 마냥 싸지는 않고, 괜히 나중에 안 쓰고 또 처박아 두게 되는 것이 아닌가 회의감이 들 무렵, 가성비 끝판왕이라는 샤오미 미밴드 포스팅을 보게 됐다. 통신 기능 없이 딱 시계와 피트니스 기능만 되는 것인데, 삼만 원이 채 안 되는 가격이니 일단 써보고 괜찮다 싶으면 그때 좋은 기계로 바꿔도 늦지 않을 것 같았다.



    이틀 만에 병원으로 도착한 샤오미는 상상 이상의 만족감을 가져다주었다. 만보기 기능은 물론, 러닝머신을 뛸 때도 심박수를 측정해 운동량을 계산해주고, 어떻게 하는 건지 원리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수면 패턴까지 (깊은 잠, 얕은 잠 수면시간) 분석하는 똘똘함에 감탄이 나왔다. 시계와 전화 알림 기능 덕에 폰을 손에서 내려놓게 되니 스마트폰 중독, 혹은 집착(!) 증도 훨씬 좋아졌다.


    명품 시계를 '셀프 선물' 하겠다는 생각으로 며칠 신이 났던 내 오랜 친구 '물욕이'는 샤오미 등장 하루 만에 맥을 못 추고 파리하게 시들어버리더니 다시 주섬주섬 짐을 싸며 집을 나갈 채비를 시작했다.


'뭐 나도 이해는 해, 암이 보통 병도 아니고... 너 이제 건강 챙겨야지. 운동 열심히 하고 밥 잘 챙겨 먹어. 항암, 방사선, 표적치료 다 마칠 때쯤에 한번 들를게. 그때는 진짜 수고 많이 했으니까 큰 걸로 하나 사자. 건강해야 명품을 걸쳐도 태가 나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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