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 만큼 쉽게 전염되는 병이 또 있을까?
그리고 모르긴 몰라도 병원만큼 이를 얻어오기 좋은 장소도 없는 듯하다.
평화롭던 진료대기실이 일순간 소란스러워졌다. 기다림이 길어짐에 화가 난 어느 보호자가 간호사에게 항의를 시작한 것. 자세한 이유야 모르겠지만 전국에서 몰려드는 환자들로 교수님들 진료 대기 늘어지는 거야 일상이고, 환자들의 검사 결과 도착 여부에 따라 순서가 뒤바뀌는 경우도 왕왕 있다. 나같이 좀 묵은 환자들이야 그러려니 하고 기다리지만 (화를 낸다고 상황이 크게 바뀌지도 않을뿐더러 암센터 진료 다니는 사람들이 진료 이외 더 바쁠 일정이 무엇 있으랴, 무엇보다도 스트레스는 건강에 최악이다!) 본인의 현재 상황이 어떠한지, 앞으로 어떤 치료를 받을지 모른 채 그저 두려움만 갖고 암센터를 처음 찾은 환자나 보호자들은 감정 표현이 격해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
차근차근 설명을 해 주면 이해 못 할 일도 아니지만 쉴 새 없이 진료 안내를 하고 또 그들의 다음 예약을 잡아줘야 하는 간호사들에게 그럴 시간은 없다. 감정을 배제한 채 '진료가 늦어지고 있으니 기다려달라'는 말만 반복해서 듣는 화난 이의 언성은 점점 높아지고, 그 '화'는 여지없이 전염된다.
이 병의 전염에는 환자건 의료진이건 예외가 없다.
"아버님~"하며 부르던 친절한 호칭은 "환자분?"으로 바뀌고, 눈을 맞춰가며 다음 진료 일정을 조율하던 시선은 모니터만 뚫어져라 응시하게 된다.
안타깝게도 오늘은 이 보이지 않는 전염병의 쓰나미에서 나라고 예외가 되지 못했다. 무인 기기에서 접수를 마치고 배정받은 진료실 앞에 있는 간호사에게 대기표를 건네자 날 선 대답이 날아온다.
"저 3번 방 담당 아니거든요? 이름 부를 때까지 기다리세욧" (평소에는 이렇지 않다. 대부분 아주 친절하시다)
사과를 했다. 3번 방 앞에 있어서 당연히 담당인 줄 알고 드렸는데 내가 잘못한 것이 있었다면 "엄청나게" 죄송하다고. 비꼬지 않고 그냥 마음 넓게 이해했으면 좋았겠지만 수양이 아직 부족하여 이런 식으로라도 티를 내고 말았다.
스스로도 아차 싶었던지 그녀는 한결 순한 톤으로 앉아계시면 안내해드리겠다는 말을 건네고 다시 모니터를 응시한다. 독을 뱉어 내게로 향하는 화를 깔끔하게 튕겨냈지만 그 기분은 썩 유쾌하지가 않다.
화난 간호사와 나 사이에 앉은 우리 어머니 연배의 여 환자는 갑작스러운 의사의 추가 검사 지시를 받고 마냥 불안한듯하다. 혹시 전이가 됐을까 두렵고, 지난번 검사 때 호흡곤란이 왔었고, 여전히 검사실 들어갈 생각만 해도 숨이 턱 막혀온다며 주절주절 늘어놓는 그녀의 넋두리는 말을 받아줄 이를 만나지 못하고 쓸쓸하게 허공으로 흩어진다. 단지 누군가 이야기만 들어줘도, 눈을 맞추고 고개만 끄덕거려도 그 마음이 어느 정도 치유될법한데 화에 전염된 사람들은 그 간단하고도 쉬운 것을 해내지 못한다.
나도 결국 못 하고 돌아왔다. 계속 마음이 쓰인다.
검사는 잘 받고 가셨을까? 그러시냐고, 걱정되시겠다고, 그래도 괜찮을 거라고 이야기 나누어줄걸.
그 간호사는 화병을 떨쳐냈을까? 아프고 날 선 사람들과 입에 단내 나게 부대끼며 오늘 참 힘든 하루가 되겠구나. 어떤 마음 씀씀이 넓은 환자가 고생 많다고 한마디 건네며 웃어주면 좋을 텐데.
역시 '치유'의 길은, 쉽지가 않다. 신체의 병이든, 마음의 병이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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