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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모토리 Oct 29. 2016

비탈에 선 할아버지


그래, 1995년이니까..


이 얘기는 아마 십 년도 더 된 오랜 추억인 것 같다. 나는 고향집으로 갈 때면 늘 동해안 7번 국도를 타는 이상한 취미가 있었다. 내가 그런 여정을 굳이 즐기게 된 이유는 서울에서 속초를 가자면 너무나 지루한 대관령 길을 넘어가야 하는데, 그 대관령 길이라는 것이 알 수 없는 슬픔이 베어 나오는 탓에 언제나 상쾌하지 않은 여행길로 변질되었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난 이른 새벽 서울에서 포항까지 무려 6시간을 족히 쭉 뻗은 고속도로를 달려 내려가 거기서 다시 버스를 타고 7번 국도를 따라 울진을 시작으로 묵호니, 삼척이니 하면서 결국 강릉을 거쳐 동해를 따라 속초로 내달렸다. 길게 뻗은 바다에 자를 댄 듯한 수평선과 시선이 일치하면 여름의 상쾌함이 두 눈에 가득 들어온다.


바다를 볼 줄 안다는 것...


평생을 바다에서 어부로 살아온 큰 고모부의 늘 맴도는 잠언 같은 말이 문득 떠올랐다.



"수평선과 일치시키면 바다가 좋아지지. 하지만 그 속을 보려고 하면 이놈들이 가만있질 않아. 난 일 년에 한 번 올까 말까 한 낚시꾼도 아닌데 말이야"


늦여름이었다. 아마 이맘때였을 거다. 살랑이는 바람과 적당한 볕의 따사로움 그리고 한창 물이 오른 눈부신 초록의 풍경들. 나는 그런 나만의 여름을 온전히 즐기기 위해 고속버스의 맨 뒷 칸에 웅크리고 앉아 빼앗길지도 모를 불안감에 떨며 수백 킬로를 북상했다.


해가 늬엇늬엇 지고 지친 몸을 끌고 집에 들어서자 식구들이 온통 한자리에 모여 뭔가 심각한 회의를 하고 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늘 그렇듯이 바닷바람이 상쾌하게 불어서 머리는 뜨거워도 다리는 시큰한 전형적인 속초 여름 날씨. 나는 그 날씨에 반가운 듯 지쳐 온 가족이 모여 앉은자리에서 그만 졸다 쓰러지고 말았다


다음 날..


집 앞에 커다란 봉고차 한 대가 들어왔다. 그제야 난 집에 내려오기 전에 형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간신히 추슬러 낼 수 있었다.


"할아버지 묘가 자꾸 기운데... 곧 무너지려나 본데... 아버지가 장마 오기 전에 어떻게 해야지 않겠냐고 하신다. 너도 바쁘겠지만 꼭 내려와라 "


형은 좀처럼 부탁이나 당부를 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냥 이래라저래라 하는 성격인데 그 날 따라 좀 이상하다 싶었다. 사실 형 하고 나는 그런 관계로 수년간 별 말없이 지내온 터지만 할아버지 산소가 주저 않을 판이라는 데야... 내가 집에 안 내려올 방도는 없었다. 그래서 오랜만에 바다도 볼 겸 아래로부터 저인망 어선의 선원이 된 것 같은 치졸한 기분으로 바다를 쫘악 긁으면서 올라온 것이다.



우리 가족은 모두 봉고 차에 올라탔다. 그런데 이때 의외의 일이 벌어졌다. 할아버지의 산소를 찾아가는 길에 갑자기 할머니가 동행을 자처하신 까닭이다. 내가 대학에 들어올 때까지 할아버지 산소를 할머니가 직접 가시겠다고 나선 것은 처음 있는 파격적인 사건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평소 당신의 남편 묘를 잘 찾지 않는 분이셨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른 사람이 보면 좀 이상하다 싶겠지만 우리가 늘 그렇게 생각해선지 아니면 또 나이가 들어 노쇠해진 부부의 연이 이젠 묘를 찾지 않아도 될 만큼 연륜이 붙었다고 생각을 했음인지, 암튼 그건 (묘를 찾지 않는 할머니) 우리 가족에게 전혀 신기한 일상이 아니었다.


작은 반전


그런데 이번 일은 신기하지도 않은 일상을 뒤집는 작은 사건이었다. 나는 왜 도대체 당뇨에 시달려 몸도 제대로 가누질 못하는 할머니가 오늘 갑자기 묘를 찾아 나선 것일까 궁금해졌다. 그러자 문득 이런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할아버지 묘가 쓰러져 간다니까.... 그럴 수도..' 달리는 차 안은 조용했다. 묘는 속초에서 북으로 두어 시간 정도 떨어진 화진포 입구 죽정리라는 동네 어귀에 있었다. 정확히 산은 아니되 계곡의 초입 능성이 쯤 되는 도저히 묏자리라는 생각이 안 드는 그런 비탈진 언덕이었다.



옛날부터 난 늘 궁금해했다. 우리 할아버지는 왜 엎어지면 코 닿는 곳이 문중 선산인데.. 하필 이런 비탈진 곳에 굳이 묻히게 되었을까. 속초에서 차를 덜컹거리며 떠난 지 한 시간 정도나 되었을까.. 중간쯤 되는 간성읍 대대리에 도착했다. 우리는 여기서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었는데... 힐끗 내 시선에 잡힌 할머니가 먼 산을 보는 눈가에 눈물이 고여있는 걸 보게 되었다.


주름살 깊게 파인 나이 속에 채 마르지 않은 눈물이 있었다니... 참, 사람의 정이란 정말 질긴 것인가. 그동안 지난 세월보다 잊힌 시간이 더 길었음을 아는데. 어찌 저렇게 눈물이 맺힐까? 당시 나는 인간의 사사로운 감정 따위를 극렬하게 저주하던 모더니즘의 신봉자였다. 그래서 가방엔 늘 폴 세잔의 구조주의 화법이 자리 잡고 있었고, 쟝 미셀 바스 퀴아보다 폴록을 찬미했으며, 언제나 오뀌스뜨 로뎅보다 앤서니 카로를 추앙했다.


나름 중대발표


암튼.. 그렇게 우리 일행은 그럭저럭 내가 태어난 고향 거진을 지나 죽정리에 도착했다. 그러자 이내 꼬불꼬불 실뱀 같은 전형적인 농촌의 나랭이 길을 따라 차를 몰아세우고 걷기 시작했다. 할아버지의 산소는 동네 사람이 부쳐먹는 작은 밭 언저리 부근 윗 쪽에 15도 각도로 아스라하게 빌어 붙어있는 형국이었는데.. 산소 뒤 울창한 밤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어 한 가위에 갈 때면 묘봉 위에 듬성듬성한 밤톨들이 얹어져 있곤 했다.



나도 거의 십 수년이 넘는 길이지만 늘 올 때마다 신기한 기운을 느끼곤 했는데 이번 역시 그랬다. 거의 쓰러지듯이 기운 남편의 묘를 두 손으로 쓰다듬으며 하늘만 올려다보고 있는 할머니. 우리는 괜히 이리저리 기침이나 하고 한식 때 잘라 놓은 잡초를 다시 한번 도리질하는 시늉만 할 뿐.. 드디어 아버지가 제사상을 올리고 지루한 벌초를 마무리했다. 그리고 우리가 묘에 둘러앉자 비장한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이제 할머니가 살아야 얼마나 사시겠냐. 그래서 할아버지 묘를 이제 옮겨야 할 때가 된 것 같구나.."


이곳에 올 때부터 사실상 예견된 선언은 할머니가 아버지에게 거의 매일 노래를 부르다시피 요구한 사항이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무슨 일인지 그런 할머니의 성화에 시큰둥하게 별 관심이 없어했다. 우린 그게 늘 궁금했지만 사실 할아버지의 묘를 이장하는 것보다 더 큰 사건들이 (연애하기, 생계 등등) 기다리고 있었기에 미처 거기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


어색한 시간


그렇게 어색한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묘에서 정서적인 측면을 제거한 듯 날 선 표정으로 할머니가 말을 떼기 시작했다. 난 그때 할머니가 우리에게 들려준 이야기를 아직도 잊지 못한다. 그 사연 속의 절절한 기억들. 난 그 날 우리 집 가계도의 진정한 실체를 알았다. 그것은 할머니의 살아있음에 대한 마지막 성토였고 나는 그날 이후 사람이 바뀌었다. 



그리고 알게 됐다. 할아버지의 무덤은 왜 하필 이런 비탈에 자리하게 되었으며, 왜 할머니는 몇십 년을 참아오던 산행을 시도했을까 라는 이유를 말이다. 난 그 날 그 이야기를 들었다. 너무나 긴 늦여름의 하루가 서쪽으로 저물 때까지, 아버지가 이제 그만 내려가자고 독촉하기 전까지 우린 아무도 자리를 뜰 수가 없었고 그 허름한 묘를 떠날 수 없었다. 그 깊고 긴 이야기를 여기에 모두 다 적을 수는 없을 것이다.. 아니 어찌 보면 그럴 수도 있겠다 싶다. 아마 이렇게 드러나 있지도 않은, 잊힌 죽음에 대해 혹 지금이라도 증언해 줄 만한 사람들을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할머니의 시간


하지만 내가 할머니의 이야기를 듣고 후에 장신리에 살아 계신 할아버지의 친구들을 수소문해봤지만 이제 생존해 계신 분은 거의 없다. 그래서 난 그날 들려준 할머니의 이야기를 사실로 각인하기로 했다. 잃어버린 여름 같은 이야기. 그날 할머니는 말했다.


"해방이 되고 전쟁이 나기 전이었지. 너희들은 전쟁이 북에서 들이닥친 것으로 알고 있지만.. 당시에 여긴 이북이었어... 우리는 빨래를 하다가 탱크가 남쪽으로 내려가는 걸 봤지. 그날 이후 여긴 전쟁이라는 게 한동안 없었어. 문제는 전쟁이 나기 전이었지... 너네 할아버지는 당시 면장이었는데, 돈 많은 유지도 아니었어. 하지만 사람들은 일본에 부역했다는 이유로 너네 할아버지를 끌고 가 비판을 하고 그 자리에서 총살을 시켰지...
그때 나는 스물을 갓 넘은 나이었고 니 아비는 코흘리개였어. 그 이가 끌려가기 전에 집으로 후다닥 들아와서는 급하게 마당에서 사진 한 장을 찍었다. 그게 마지막이었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지... 너네 할아버지를 찾는데 3일이나 걸렸다. 사람들은 웅성거렸어. 죽을 만한 놈들이 다 죽었다고 하면서 속이 다 시원하다고 그랬지. 하지만 게 중에는 나와 함께 할아버지 시신을 찾아준 고마운 이도 있었어... 그렇게 삼일 만에 찾은 시신을 최씨 문중에서는 받아주지 않았지. 코 앞이 선산인데.. 할아버지는 늘 저기에 묻히고 싶어 했단다. 하지만 그건 꿈이었어. 객사한 사람을 문중 선산에 묻을 수 없다는 어르신들의 반대가 심했거든. 나로선 어쩔 수 없었다.
이제 조금 평평한 곳으로, 햇빛 밝은 곳으로 모셔 드려라. 일제에 면장질 한 것이 흠이라면 흠이지만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니었어. 너무들 욕 하지는 말고, 부끄러워하지도 마라. 네 할아버지는 좋은 사람이었어...."


할머니는 그 이후 몇 년을 더 사시다가 돌아가셨다. 하지만 할머니의 소원대로 할아버지 묘를 옮기지는 못했다. 피맺힌 원한을 이장으로 해결할 수 있다면야, 당장이라도 묘를 옮겨야겠지만, 사람사는 세상살이가 언제나 결심한 대로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할머니 앞에서는 당장이라도 묘를 옮길 것처럼 말했단 아버지도 무속이나 풍수를 믿지않는 탓에 차일피일 미루다가 이장은 결국 빈말이 되고 말았다. 오늘 같은 날... 할머니 생각이 저리게 다가온다. 그냥 또 술이나 한 잔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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