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레멘(Bremen)-하멜른(Hameln)- 보덴 베르더(Bodenw-)
69유로짜리 짜릿한 경험을 안겨 준 암스테르담을 뒤로하고 캠핑카는 독일 북부로 스멀스멀 기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다음 예정지가 독일 북부에 위치한 동화가도(märchenstraße)였기 때문이다. 동화가도는 아시다시피 그림형제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그들이 태어난 하나우부터 동화 브레멘 음악대의 브레멘까지의 총 600km의 도로를 칭한다. 음, 하지만 철은 안 들었어도 모양새만 보면 난 어른이었다. 내가 지금 동화 이야기를 따라갈 나이는 아니잖아? 먹고살기 바빠서 동화책 같은 건 다 잊어버린 나이인데. 안 그런가?
하지만 곧 생각을 바꾸기로 했다. 아무렴 어때, 어렸을 적 읽었던 동화책 얘기 속을 한번 직접 돌아보는 것도 좋은 일이 아니겠냐는 자위를 하며 우린 지도 위에다 그 길을 형광펜으로 진하게 그어 버렸다. 사실 말인데 날씨만 좋다면야 캠핑카를 타고 돌아볼만한 독일의 가장 멋진 드라이브 코스이기도 한 곳이 바로 이 길인데.
암스테르담에서 하루 종일 400Km를 달려 내려와 브레멘에 도착한 시각은 역시 해가 떨어진 저녁시간. 오후 5시 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거리엔 사람들이 거의 없고, 상점들은 대부분 문을 닫고 들어가 버렸다. 브레멘은 관광지라 늦게까지 문을 연 상점들이 더러 있었지만 여기까지 오는 거리 동안 작은 동네엔 거의 사람들이 살지 않는 도시처럼 조용하고 서늘해 보였다. 독일의 북부 겨울은 밤이 길고 날씨가 고약하기로 유명하다. 일주일 동안 해가 나오지 않는 날도 더러 있다고 할 정도이니 그 깊은 밤을 사람들은 무엇을 하면서 보낼 까 궁금해지는 건 당연지사.
지금 서울 같으면(15년 전 ^^) 종로나 신촌 등에 사람들로 가득 메워질 시간인데 거리엔 사람들이 없다. 그 궁금증은 브레멘의 작은 중세 골목인 슈노어 지구에서 풀렸다. 브레멘은 독일의 도시 중에서도 아주 작은 자치 도시인데 그 조그만 도시 속에 15세기에서 18세기 동안 지어진 집들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지역이 있다. 이곳이 바로 슈노어 지구(SCHNOORVIERTEL) 다. 이 골목은 지금은 장인들이 직접 수공예로 만드는 아름다운 인형 가게들과 조그만 바들로 멋들어지게 장식되어 있는데, 조그만 골목 안에 있는 레스토랑과 바에는 뜻밖에도 시내에서는 볼 수 없었던 많은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동네 사람들과 가족들 그리고 관광객들이 모두 한데 어울려 생일파티를 하는 모습까지.. 많은 주민들은 동네의 조그만 바에 모여 하루 일과를 이야기하고 가족들과 수다를 떨고 있다.
사실 한국에서 일상적인 하루의 패턴은 가족보다는 직장에 더 치우쳐 있을 정도로 직장 사람들과의 관계가 하루 종일 계속되지만 이 독일 북부의 조그만 마을에서는 그러한 풍경보다는 우선 가족들과 함께 하는 시간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정해진 시간 동안 일을 하고 그리고 나머지 시간은 철저하다시피 가족들과 함께 깊고 오랫동안 밤을 함께 보내는 것이 일상적인 하루가 되어버린 것이다. 독일의 밤이 을씨년스럽기보다는 여유롭고 넉넉해 보이는 이유이기도 했다.
그런 푸근한 마음을 안고 슈노어의 깜찍한 인형가게 골목을 떠난 우리는 다음날 하멜른으로 키를 잡았다. 하지만 전날 브레멘에서 싸고 맛있다고 내가 맥주를 너무 들이켜는 바람에 하멜른으로 향하는 일정은 부득이하게 아침부터 늑장을 부리게 되었다. 그놈의 숙취~! 근데 뭐 어때? 어차피 떠나고 싶을 때 떠나자고 시작한 여행! 그게 캠핑카 여행 아니었나? 맞잖아. 패키지여행이 아니라 좌충우돌 캠핑카 여행이기에 나의 숙취를 핑계 삼아 조금 더 늦게 출발해도 좋았다. 변명이라지만 언제부터인가 난 그런 여행이 하고 싶어 졌다. 시간에 촉박해 서둘러 뛰어다니는 그런 숨 가쁜 여행이 아니라, 겨우 목적지에 와서 날름 기념사진 한 장 찍고 훌쩍 떠나버리는 얄팍한 여행이 아니라, 그저 있고 싶을 만큼 있다가 지겨우면 어디론가 다른 예정지로 떠나는 그런 여행 말이다.
난 지금 그런 여행을 하고 있었다. 좀 늦어져도 좋은 이유였다. 다행히 햇빛이 쨍하고 잠깐 난 사이 기분 좋게 독일 6번 국도를 달려 하멜른에 도착한 시각은 오후 5시. 지겹게 말하지만 독일의 겨울 하루는 너무나 짧다. 어정쩡하게 이동하게 되면 십중팔구 오후가 넘어 어스름해지는 저녁에 목적지에 도착하곤 했다. 하멜른은 동화가도 중에 있는 조그만 도시로 세계의 명작동화 중 늘 단골 메뉴로 등장하는 피리 부는 사나이의 전설이 내려져 오고 있는 유명한 마을이다. 난 별로 재미없어하는 동화 중 하나였지만...
때는 겨울이라 캠핑카를 세울 공간이 번화가 주변에도 넉넉해서 우리 일행은 굳이 예정에 없던 캠핑장에 들어갈 필요는 없었다. 물도 꽉 채워져 있었고 하노버에서 장을 봐온 턱에 음식도 꽤 비축되어 있으니까. 물론 시내에서 캠핑카를 세워놓고 자는 것은 불법이지만 조그맣고 조용한 동네라서 주의만 끌지 않으면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아무리 유럽이 캠핑장이 잘되어 있다고는 하지만 모든 마을에 전부 캠핑장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우리가 타고 있는 캠핑카가 독일 넘버가 달린 차라는 것도 다행 중 하나였다. 일단 시청 근처에 차를 세워두고 하멜른 시내로 들어갔다.
11월. 하멜른 역시 다른 유럽 도시들 못지않게 크리스마스 장식으로 화려하게 치장되어 있었다. 쇼 윈도마다 성탄을 알리는 트리가, 가판대마다 산타 모자가 널려 있다. 우리는 여기서 처음으로 동네의 작은 맥주 집에 들어가 시원하게 목을 축일 수 있었다. 여행 중 처음 있는 바에서의 맥주 마시기였다. 시내 한가운데 있는 작고 아담한 바 'Paulaner im Rattenkrug'에는 동네 사람들이 하루 일을 끝내고 가족들과 혹은 친구들과 삼삼오오 짝을 이루어 맥주를 시켜놓고 식사를 하면서 하루 일을 요란스럽게 이야기하고 있다. 크리스마스 캐럴 소리에 문득 가족! 가족이라는 단어가 새삼스레 떠올랐다.
유럽에서는 캠핑카 여행을 가장 많이 하는 구성원이 바로 가족이다. 우리의 가족 여행은 지금 어떤가? 각자의 취미에 맞게 따로 떨어져 서로들 괴리되어 있는 것이 어쨌거나 대부분의 현실이다. 하지만 유럽에선 가족이 함께 움직이는 것이 가장 큰 여행의 미덕이다. 휴가기간이 단 일주일이라도 온 가족이 일 년 동안 계획을 짠다. 그리고 필요한 것을 모아서 캠핑카에 싣고서 자유롭게 떠나는 것이다. 우린 하멜른의 조그만 레스토랑에서 독일산 파울라너 (Paulaner)를 앞에 놓고 캠핑카 여행에 관한 이야기로 한참 동안을 그렇게 구시렁대며 즐거워했다. 가족이건 친구건... 그건 이미 우리에겐 문제가 아니었다!
다음날 하멜른을 등지고 마지막으로 우리가 찾아간 동화마을은 보덴 베르더. 내가 어렸을 적 무척이나 좋아했던 동화 허풍선이 남작의 고향 마을이다. 이 동화책은 이상하게도 아버지의 책장 그것도 선데이 서울류의 난잡한 잡지들이 즐비한 한가운데 늘 꼽혀 있었는데, 난 그 동화책이 왜 늘 거기에 꼽혀 있었는지 그 이유를 알기가 힘들었지만 어쨌거나 허풍선이 남작이 보여준 그 말도 안 되는 허풍의 세계를 늘 그 책장에서 뽑아 읽어보고선 새삼 동경하고 있었다.
보덴 베르더 시내를 걸으며 이런저런 상상을 하다가 시청사 앞에 있는 허리 잘린 그의 말 동상에서 나오는 약수 물을 마시고 있을 때 우린 거기서 운 좋게 독일식 전통 결혼식을 맞닥뜨리게 되었다. 우리가 본 풍경은 독일의 일반적인 결혼식 중 결혼신고를 하고 일가친척들과 친구들에게 그 사실을 알리는 결혼식 두 번째 날의 행사였다. 독일의 결혼식은 보통 세 단계로 나뉘어 3일 동안 진행되는데 첫째 날은 폴터 아벤트(Polter Abend)라고 해서 결혼식 전날에 열리는 파티이고 둘째 날은 결혼 등록소에 가서 결혼식을 올리는데 우리가 본 것이 바로 이 장면이었다.
보덴 베르더의 시청사에서 혼인신고를 마친 신랑과 신부는 밖에서 미리 대기하고 있던 가족과 친구들의 환영을 받는데 특이한 점은 그것이 무척 간소하다는 것이다. 음식이나 술은 아예 준비된 게 없고 아주 간단하게 나무토막을 서로 합심해 큰 톱으로 자르고 하트가 그려진 천을 신랑이 신부를 안고 통과하는 이벤트만이 있을 뿐이다. 형식이 간단하다고 사랑도 작아질까? 그런 건 절대 아니다. 형식이 요란하다고 사랑도 배가 되는 건 아니니까. 그 결혼식은 우리에게도 재밌는 경험이었지만 그들에게도 캠핑카 타고 날라 온 나 같은 코리언이 진심으로 축하해 주었으니 아마도 뜻깊은 결혼식이 되지 않았을까.
결혼식이 끝나고 캠핑카를 타고 동화 가도를 빠져나오는데 캠핑카 창밖으로 무엇인가가 어른거렸다. 자세히 보니 포탄 위에 올라타고 우릴 따라오는 이가 있었으니 그는 바로 동화 속 허풍선이 남작이었다. 그리고 그는 나에게 이렇게 한마디 떠벌리고 난 후 거짓말처럼 휙 하고 허공으로 사라져 버렸다~~!
“야~ 이 친구야, 인생 너무 심각하게 살진 말게~ 살면서 가끔은 나처럼 허풍도 떨고 살아야 그게 재밌는 인생살이 아니겠어? 푸-하하하”
그때였다. 오랜만에 독일에서 침침했던 구름 사이로 밝은 햇살 하나가 아름답게 떨어지고 있었다.
Damotori's travel notes_브레멘, 미스 프랭의 식당을 찾다
미스 프랭은 여러모로 지루한 일상에 질려 있었다. 저녁에 늘 만나던 마을 사람들을 위해 서빙을 드는 것도 지루하고 가끔씩 찾는 이방인 손님들에게 호감을 사 하루의 데이트를 즐기는 것도 이젠 따분한 일로 전락했다. 황금 금괴를 들고 찾아온 악마는 그 날 그들이 나누는 소리를 창밖에서 몰래 듣고 있었다. 나는 그 작은 도시의 어떤 Bar의 창문을 들여다보며 그렇게 미스 프랭을 만나고 싶어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