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 벼룩시장 BMW와 되너 케밥의 유혹 / 베를린

베를린 (Berlin)

by 다모토리
“야! 풍경 죽이네...”


그때 난 캠핑카 안에서 커피를 한 잔 놓고 무라카미 류가 쓴 낡은 에세이집을 읽고 있었다. 전 인류를 대표해 호색한을 자처하던 저자가 호접지몽을 거들먹거릴 정도로 칭찬하던 이빨 빠진 중국인 창녀의 이야기가 실은 너무나 현실감이 떨어져 그냥 꾸벅꾸벅 졸고 있었던 것 같다. 나른하도록 천국의 문 앞까지 도달할 즈음에 베를린을 향해 한참을 운전하고 있던 친구 녀석이 버럭 소리를 질러서 단잠에서 깨어났다. 창밖을 보니 지도상에서 독일의 하르츠 산지를 넘어가고 있었다.


“오왓, 멋지구먼~그냥 지나칠 수 없지... 사진 한 방 박고 가자!”



중부 독일의 하르츠 산지는 해발고도 500∼1,000m에 이르는 동독과 서독 지역에 모두 걸쳐 있는 고산지대로 길이가 100㎞에 이르고, 최대 너비는 약 32㎞ 정도 된다. 물론 괴테의 '파우스트'에 등장하는 브로켄산이 우뚝 솟아있어 우리에게 더욱 유명한 지역이다. 이 곳은 10세기∼16세기에는 금과 은을 비롯해 구리, 철 등이 많이 나서 광업이 성행하던 지역이었지만 지금은 우리가 바로 전에 들렸던 고슬라처럼 관광업과 산지에 얽힌 낭만적인 전설 등을 기반으로 스포츠를 즐기는 아름다운 경관지역으로 급부상하고 있었다. (참고로 중세도시 고슬라에 인접한 람멜스베르그 광산은 무려 1,000년이 넘는 채광 역사를 가진 곳으로 폐광된 뒤 박물관과 체험 시설 등이 갖춰졌으며 현재는 세계문화유산과 지오파크에 지정된 바 있다)



도로 사이를 그득하게 메운 전나무 숲을 지나면서 2차 대전으로 폐허가 된 민둥산에 이런 산림을 인공적으로 만든 독일 사람들에게 다시 한번 놀라버렸다. 나는 부랴부랴 차에서 내려 얼렁뚱땅 숲 속에 취해 원숭이처럼 이리 뛰고 저리 뛰고 다니다가 차를 몰고 겨우 숲을 빠져나왔더니 이번엔 끝이 보이지 않는 광활한 평지가 사방에 펼쳐진다. 그리곤 문득 나에게 하르츠 산지가 낯설지 않은 것과 이 길을 일부러 여행경로에 넣은 이유가 떠올랐다. 그건 다분히 개인적인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어릴 적 뭔가 공포스럽기도 하고 신비스럽기도 한 묘한 책을 한 권 읽게 되었는데 그 책이 바로 하인리히 하이네의 <하르츠 기행>이다. 1824년에 그가 이곳을 묘사한 기행문 형식의 시집이다.


저는 겁이 많은 소녀랍니다. 그래서 어린애처럼 무서움만 타지요. 밤중이 되면 산속의 유령들이 심술궂은 장난을 하러 오지요. 그 순간 아가씨는 입을 다물고 스스로 한 말에 겁이 나는지 조그만 두 손으로 두 눈을 살짝 가려버렸지. 전나무는 한층 더 세차게 흔들리고 물레는 윙윙 소리를 냈다. 그 사이로 기타는 흘러간 옛 가락을 울려 주었다. "무서워하지 마렴, 귀여운 소녀여. 유령의 힘 따윈 별게 아니야. 낮이나 밤이나, 귀여운 소녀여 하늘의 천사가 널 지켜 주지!" - <하르츠 기행 중에서>


하르츠는 동화 가도에서 빗자루를 타고 날아오는 마녀의 전설로 유명한 지역이다. 독일의 성인 발부르가(St. Walburga)를 기념하는 전야제인 4월 30일 밤이 되면 세상의 온갖 마녀들이 빗자루를 타고 하르츠 산맥에 있는 브로켄산으로 모여든다. 독일 마녀들의 대집회가 이곳에서 열리는 것이다. 시인 하이네는 그 미지의 풍경을 이렇게 노래하고 있었다. 해가 지면 시골 동네 성황당도 무서워서 못가는 겁쟁이였던 나에게 세상의 모든 마녀들이 빗자루를 타고 날아드는 그 산은 공포 그 자체였다. 하지만 그는 심술 맞은 마녀들의 총궐기를 쾌활하게 받아치고 심지어 풍자까지 하고 있었던 것이다. 무서움에 떨던 아이는 이내 동화 속으로 침잔하며 언젠가는 그 숲에 한번 가보리라 마음을 먹게 되는데, 지금 내가 이 길을 지나가고 있었으니. 감개무량이구나.


하지만 그때가 오후 1시쯤. 그렇게 세계적 시인의 작품 배경을 바라보며 감상적인 느낌을 가질 만도 한데 갑자기 배가 출출해졌다. 인문학이니 역사학이니 기행문이니 이런 것들도 그저 금강산 식후경 앞에서는 맥을 못 추리니 우린 사실 그저 덜 떨어진 무식한 여행자들이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결심은 빠르게 행동으로 옮긴다. 우린 그 평원에 시원하게 야외용 테이블을 깔고 그동안 아껴오고 또 아껴왔던 너구리를 배부르게 털어 먹었다. 그 야외취사는 정확하게는 불법취사였지만 말이지. 너구리 라면이 브로켄 산 마녀들보다 더 강력한 포스를 지닌 하르츠 스토리텔링의 주인공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아름드리 나무들로 울창한 하르츠 산길과 평야를 달려 도착한 곳은 베를린이었다. 역시 날씨는 북부 유럽의 겨울을 실감하게 했다. 이거 어두침침까지는 어떻게 견뎌 보겠는데 그 심한 칙칙함은 우리의 여행 심기를 계속 다운시킨다. 베를린에 너무 늦게 도착했기 때문에 우린 일단 안전한 시내 외곽 Gatow 캠핑장에서 하룻밤을 자고 다음날 시내로 나왔다.



우리는 베를린에서 공부를 하고 있는 친구의 지인을 소개받아 잠시 신세를 지기로 했기 때문에 그를 만나러 베를린 중앙역에 나갔다. 나랑 동향인 곳에서 조각을 전공한 그 친구는 베를린 종합예술대학에서 미술이론을 공부하고 있었다. 바쁜 일과를 뒤로하고 낯선 여행자들을 반갑게 맞이해 준 그가 참 고마웠다. 힘들게 그를 만나 일단 우리가 짐을 푼 곳은 그의 작지만 아늑한 기숙사.



기숙사는 시내 곳곳에 건물 형태로 분산되어 있었는데, 여러 대학 학생들이 이곳에서 함께 생활하고 있었다. 짐을 대충 풀고 나서 우린 간단하게 커피를 끓이기 위해 같이 공동주방으로 갔다가 그가 기숙사 생활에 얽힌 재밌는 에피소드 한 구절을 소개해 주었다.


“여기 기숙사는 주방을 공동으로 써요. 뭐 국적도 다양하죠. 한 번은 한국인 친구가 된장을 살짝 끓여 먹었다가 냄새 때문에 곤란한 일을 겪은 적이 있었어요. 사실 그 문제가 불거져서 결국은 나가게 되었는데. 글쎄, 이 친구 나갈 때 밤새 청국장을 끓여놓고 갔나 봐요. 기숙사 전 동이 발칵 뒤집혔었죠. “


“아휴~ 그 친구 해도 너무했네요. 하지만 그건 걱정 마세요. 우린 캠핑카가 있잖아요. 캠핑카 가서 청국장 한번 시원하게 끓여먹어 볼까요?”



정말 그랬다. 캠핑카가 좋은 것이 바로 그런 것이었다. 오징어를 구워 먹건, 청국장을 끓여 바케트에 발라먹던 문만 닫으면 한국이니 뭣이 걱정이겠는가. 가끔 여기가 베를린인지 한국인지 가끔 헷갈려서 그렇지. 음식의 자유가 있는 여행이 내가 보기엔 바로 이 캠핑카 여행이었다. 그래도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랬다고 하지 않았던가. 캠핑카 레시피(recipe)는 주로 여행경력이 많은 내 친구가 맡았는데 우린 가능하면 그 나라에 맞는 식사메뉴를 택하고 있어서 빵으로는 식사를 때우지 못하던 나도 이젠 어느 정도 슬슬 커피와 베이컨 넣은 바케트에 적응해 가고 있었다.



그 날 저녁 우리는 고슬라에서 공수해 온 맥주를 기숙사 바닥에 늘어놓고 그의 유학생활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나 역시 조각을 전공했지만 그가 아직도 이렇게 건재하게 자신의 분야에서 무엇인가를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는 모습이 좋아 보였다. 부러웠다고나 할까? 언젠가 나도 조그만 시골에 아담한 작업실을 가지고 싶다는 꿈을 꾼 적이 있었다. 청량리에서 333번 버스를 타고 마석 골짜기로 올라가면 수동면 파위라는 조그만 마을이 나오는데, 여기에 동기들과 선배가 소 축사를 개량해 조각 작업실을 낸 적이 잠시 있었다. 6월이면 햇살이 따사롭게 비치는 조그만 서재에서 몸통을 있는 대로 오그려 햇살을 받아내며 책을 읽던 내 모습이 떠올랐다.


그때 어떤 선배가 폐차하라고 준 하얀색 멍텅구리 맵시나를 학교에서 작업실까지 끌고 다니며 날 태워 주던 친구가 바로 내 옆에서 지금 여행을 같이 하고 있다. 하지만 우린 지금 그 꿈에서 멀어졌다. 아니 그 세계에서 버거워 뛰쳐나왔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작업을 접고 다른 앵벌이의 세계로 들어갔을 때 꿋꿋하게 작업의 길을 갔던 대학 동기 녀석들이 공부한 곳이 바로 이 곳 베를린이었다. 아이까지 낳아가면서 말이지. 갑자기 그들의 얼굴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다음날 아침. 만취한 탓에 어제의 기억은 잘 안 나지만 두런두런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횟수를 기억하지 못할 건배 소리에 취해 자연스럽게 널 부러졌던 전쟁터 같은 기숙사 방을 아침부터 주인장이 깔끔하게 치워놓았다. 한참 후에야 잠에서 깬 우리는 미안한 맘에 아침 겸 점심은 캠핑카에서 대접하리다 제안했다. 오래간만에 한국식 된장으로 아침을 발라먹고 정신을 좀 차린 뒤 우리가 찾아간 곳은 베를린 외곽 중고차 벼룩시장인 칼 막스 스트라세! 여기서 그동안 잠잠했던 일행들 눈동자가 180도로 땡글땡글 움직였다. 월마트 주차장에서 열리는 이 자동차 중고시장은 프랑스에서도 자동차를 싸게 사기 위해 직접 오는 사람이 많을 정도라고 한다. 차의 상태가 좋고 신뢰할만한, 무엇보다 저렴한 중고시장이기 때문이다.


“BMW 밤갈색 중고 - 1800유로”


이곳에서 친구 녀석이 발견한 차다. 최고급 사양은 아니지만 사고 난 경력 없고 중저음 우퍼까지 설치된 이 클래식 밤갈색 BMW는 폼생폼사를 실천 및 행동강령으로 삼고 있는 친구에게는 눈이 번쩍 뜨이는 물건이었다. 1,800 유로면 사실 우리나라 돈으로 250만원(15년 전 당시 물가 수준)도 안 되는 정말 싼 가격 아닌가! 서울 집에 있는 깨끗한 엑센트 중고보다 싼 가격에다가 상태도 좋고 주행거리도 10만 Km가 넘지 않았던 녀석. 독일에서는 15만 Km는 기본적으로 타고 다니는 거리라고 한다. 늘 자동차를 직접 손질하고 관리하는 여기 사람들은 10만 km 정도가 되지 않은 차는 앞으로도 몇십 년은 정비하면서 더 탈 수 있다고 보는 것이 관례란다.



이리저리 차 옆에서 떠나지 못하며 손가락 셈을 하고, 계산기를 두들겨 보고, 일행에게 어떻게 하면 한국에 공수할 수 있냐고 자문도 구해보고, 한 동안 자리를 뜨지 못하던 친구는 드디어 나에게 어딘가에 꼬불쳐 놓았던 돈이 있는 게 분명하다는 듯 이상한 눈초리를 보내기 시작한다.


“야, 너 진짜 사려고? 돈 있냐?”


“야, 이거 무지하게 싼 거거든. 거저야 거저. 근데 진짜 아깝다. (에이.. 이거 질러 말어..)”


“아서라, 아서! 이눔아~돈도 없는 놈이 차는 개뿔, 그나저나 급한 빨래부터 하러 가야 되는데?”



문지방에 붙여 놓았던 껌을 떼어 다시 씹는 심정으로 우린 그 벼룩시장에서 헤어 나왔지만 사실 속내는 무척 안타까웠다. 내가 보기에도 워낙 싸고 상태가 좋아 보였으니. 하지만 앞으로 여행이 더 남았고 덜컥 구입해도 가져가는 것이 여간 번거롭지 않다는 지인의 말에 결국 우린 승복할 수밖에 없었으니. 당대의 폼생폼사가 쪼금은 기가 죽을 수밖에. 그러자 현지 지인이 중고차 시장에서 풀이 죽은 내 친구 녀석이 안타까웠는지 그가 자주 들르는 아주 맛있는 케밥집에서의 점심을 제안한다.


오호라. 케밥이라! 이번엔 모두의 엔돌핀이 넘친다. 영국에서 공부한 친구는 케밥 마니아. 물가가 비싼 영국에서 주로 싸게 먹던 케밥에 필이 꼽혀있던 녀석으로선 쌍수를 들어 좋아할 만한 제안이었다. 케밥이라! 이제 우리나라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 케밥은 구운 양고기와 신선한 야채, 그리고 상큼한 소스를 넣어 먹는 터키 전통 음식으로 양고기의 기름을 얼마나 잘 빼는가에 따라 맛의 질이 천차만별로 변하는 음식이다. 맛있는 케밥집을 별로 경험해 보지 못한 나는 일종의 호기심으로 따라나섰다!



그동안 쌓아두었던 세탁물을 근처의 무인 세탁기에 넣고 집 근처 대로변에 위치한 Balle shop에 도착. 여기서 파는 되너(Doner) 케밥이 엄청나게 맛있는 녀석이란다. 우리로 치면 종로 거리의 떡볶이 포장마차와 비슷하다고 해야 할까. 아무튼 앉아서 먹을 테이블 하나 없어서 우린 줄지어 서서 그 큰 되너 케밥을 들고 먹어야 했지만, 잠시 후 케밥의 달콤한 맛으로 인해 서 있는 것 자체의 짜증 따위는 금세 사라져 버렸다. 그 큰 케밥이 한 입 들어간 후 눈만 꿈뻑꿈뻑하던 친구 녀석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야! 이 케밥 정말 끝내주네. 서울 가면 이 장사하면 떼 돈 벌겠다. 끝났다. 끝났어"


베를린 근교의 이 되너 케밥은 기름을 완전히 빼어버린 양고기를 잘게 썰어 야채를 뿌리고 특히나 그 야릇한 소스가 주는 맛이 담백하면서도 쫄깃한 케밥 특유의 매콤함이 살아있는 말 그대로 멋진 예술작품이었다. 자동차 시장에서는 BMW 산다고 친구가 한바탕 난리를 치더니 케밥집에서는 모두가 난리굿이 났다. 이거 배워서 서울 가서 장사해야 한다고 설레발을 토한다. 실은 배울만한 가치가 있는 맛이었다. 맛뿐만 아니라 가격에도 메리트가 있어 물가가 비싼 베를린에서도 케밥 하나에 2유로, 우리 돈으로 2800원 정도에 한 끼 식사로 충분하니 모두가 한국 가서 이 케밥 장사하겠다고 난리 법석을 떨었던 것도 일리가 있는 생각이었다. 사실 난 그때는 조용히 하고 있었는데 내가 정말 걱정한 것은 친구가 캠핑카 중고로 사서 거기서 케밥 장사하자고 조를까 봐 그게 진짜로 조마조마했었다는 거지.... 뭐! 그렇게 베를린의 두 번째 날이 저물고 있었다.




Damotori's travel notes


그들은 과연 저 차에 탈 수 있을까?

베를린의 조그만 동네 시장을 가로질러 가는 도중에 만난 풍경. 조그마한 로버 미니로 가는 찰나. 과연 저 덩치들이 조그만 차에 다 탈 수 있을까? 덩치에 안 맞게 조그만 차를 선호하는 유럽 사람들. 로버 미니는 앙증맞은 차체에 비해 매우 실용적인 차이다. 간편한 주차로 늘 약속시간을 지켜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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