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다모토리 Aug 07. 2018

전쟁이 만든 인간의 얼굴 <이반의 어린 시절>

이반의 어린 시절  Ivan's Childhood (1962)


우리는 전쟁을 어떤 표정으로 인식하고 있을까?
                                                                                                                                     


이반의 어린 시절 (My Name is Ivan)은 러시아 영화감독으로 영상시인이라 칭송받고 있는 거장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초기 대표작이다. 블라디미르 보고몰로프의 원작 소설 <이반>을 각색한 작품으로 영화의 줄거리는 간단하다. 2차 세계 대전 당시 러시아를 배경으로 12살짜리 아이가 전쟁에 뛰어들어 겪게 되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하지만 이 단순한 영화적 구도를 감독은 처절한 전쟁영화로 빚어낸다. (원작의 제목에 굳이 ‘어린 시절’이라는 제목을 덧붙인 까닭은 주인공인 12살 이반의 어린 시절을 상상하는 것 자체가 아이러니를 내포하고 있으며, 이는 전쟁으로 인한 이반의 성숙함을 극적으로 강조하기 위함이다)



이 영화의 중심엔 가녀리고 어린 소년의 얼굴이 있다. 평화로운 시기에 엄마와 함께 행복하게 뛰어놀던 아이의 표정은 꿈에서 깨어나자마자 마치 전쟁을 상징하는 듯한 비장한 얼굴로 바뀐다. 감독은 소년의 얼굴을 통해 우리가 기억하는 전쟁을 치열한 전투나 잔인한 폭력장면 하나 없이 완벽하게 그려내고 있다. 부모와 가족을 잃고 전쟁에 면역을 지니게 된 주인공 이반의 표정은 이 영화의 가장 빛나는 수확이자 상징이다.


단 8편의 영화로 세계적 거장이 된 감독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감독


영화 이야기를 하기 전에 잠깐 감독 얘기부터 좀 하고 가야겠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감독은 평생 단 8편의 영화만을 발표했음에도 빔 벤더스 감독의 <베를린 천사의 시>에서 프랑스와 트뤼포,  오즈 야스지로와 함께 천사로 묘사될 만큼 20세기 영화사의 중요한 인물로 꼽힌다. <이반의  어린 시절>은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초기 대표작으로 이 영화가 베니스 국제영화제에서 대상을 수상하면서 세계적으로 이름을 알렸다.

   

당시 베니스 국제영화제 심사위원장이었던 장 폴 사르트르는 이 영화를 ‘사회주의적  초현실주의’라며 극찬했지만 소련 정부가 이 영화에 담겨진 메시지에 이의를 제기하면서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는 당국으로부터 제재를 받기 시작했으며, 결국 소련에서 창작활동이 금지된다. 이후 그가 1984년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망명 선언을 하자, 소련 당국은 그를  입국 금지시켰다. 이후 타르코프스키는 이탈리아에서 <희생>(1986)을 발표했지만 이 영화가 그의 유작으로 남았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유작이 된  <희생>


<이반의 어린 시절>에서 소년의 얼굴은 감독 자신의 얼굴을 상징화시킨 것이다. 타르코프스키의 인터뷰 중에 자신의 어린 시절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는 자신의 불행하고 힘들었던 어린 시절이 역설적으로 가장 아름다웠던 시기였다고 토로한 바 있다. 이 시절의 기억이 이 영화 전편에 흐르며, 영화를 이끌고 가는 소년 캐릭터의 창작적 원천이 되었음을 짐작케 한다. <이반의  어린 시절>에서 유작이 돤 <희생>까지 그의 생애 모든 영화들은 후대 영화인들에게 끊임없는 자양분을 공급하며, 지금도 창작의 불씨를 지피고 있다.


<덩케르크>와 같거나 엄청나게 다르거나
 

2차 대전을 다룬 영화 중에서 총을 든 독일군이 등장하지 않는 영화는 찾아보기 힘들다. 독일군이 등장하지 않아 화제가 된 영화는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최신작 <덩케르크>가 대표적이다. 하지만 <이반의 어린 시절>이야말로 전투하는 독일군이 등장하지 않아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킨 원조 전쟁영화이다.



여기에서 주요한 제작 시점이 하나 있는데, 하나는 1962년에 만들어졌고, 또 다른 한 편은 21세기에 만들어졌다는 사실이다. 물론 놀란 감독은 C.G를 극단적으로 배제하는 감독으로 유명하다. 대표적 사례가 덩케르크에서 날아다니는 전투기가 당시의 것을 고쳐서 실제로 운행한 것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영화적 기술수준으로 볼 때 1962년의 그것과는 게임이 안 되는 수준차가 난다고 말할 수 있다. 여기에 하나 더 보태자면 미국의 헐리우드도 아니고 러시아의 영화 기술을 생각해 볼 때 영화 비교 자체가 사실 불가하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영화는 기술로만 만드는 것이 아니다. 영화는 어떤 의식의 흐름이다. 영화를 따라가다 보면 문득 영화 속에서 나를 만날 수도 있고, 나의 가족을 발견할 수도 있으며, 심지어 나에게 다가올 사랑 또한 예측이 가능하기까지 하다. 영화는 무수한 나무와 풀, 생명체들로 이루어진 숲 속에서 나라는 한그루 나무를 찾기 위해 냄새를 잘 맡는 감독견을 데리고 산책하는 즐거운 길이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시작된다.



<덩케르크>와 <이반의 어린 시절> 이 두 편의 영화는 전쟁이라는 참혹한 현실을 집중적으로 강조하기 위해 특별한 장치를 두었는데, 그게 전쟁에서 아군의 상대편인 적군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놀란 감독의 경우 덩케르크의 비장한 후퇴 장면을 연출하기 위해 독일군 병사를 없애는 대신 패잔병 이외에 민간인, 어부, 조종사 등 전혀 다른 캐릭터를 시간대별로 중첩시켜 전쟁이란 현실을 색다른 시각으로 바라보게 배려했다. 이 시각은 놀라운 사고의 전환을 불러일으켰는데, 나는 그의 의도와 상관없이 중첩되는 시간대의 사건이 나타날 때마다 자꾸 감독의 얼굴이 떠올라 당혹스러웠다. "역시 놀란감독이군!!!" 이래선 도무지 영화에 집중할 수가 없다. 나에게 <덩케르크>가 몹시 씁쓸했던 이유다.      



이와 반대로 <이반의 어린 시절>은 감독이 일부러 설정한 시추에이션 샷들이 난무함에도 불구하고 감독 얼굴이 전혀 떠오르지 않는다. 주인공 이반의 얼굴 표정이 만들어내는 강렬한 반전이 이어지다가, 전쟁 중 러브라인이 문득 끼어들기도 한다. 어찌 보면 어수선하고 투박한 썃들로 이루어져 있는데, 정교하지 못한 영상 자체가 현실적인 느낌을 준다고나 할까? 너무 세련된 미장센으로 군더더기가 없는 놀란 감독의 작품을 감상하며 느끼는 허무함 따위가 끼어들 여지가 없다. 잉마르 베르히만이 왜 타르코프스키 감독 때문에 영화가 예술이 되었다는 말을 했는지 느낄 수 있는 부분들이 종종 등장한다. 이반의 눈빛이 상징하는 깊은 몰입감을 따라가다 보면 감독에 대한 생각이 말끔하게 정리되기 때문이다. 관객은 영화의 주인공에게 집중해야지, 감독 그 자체의 설정에 감동하면 폭망인 것이다.



인간이란 전쟁 속에서도 관계를 맺는다. <덩케르크>에서의 관계는 감독이 깊숙하게 개입해서 설정한 시간대별전쟁 씬으로 등장하지만, <이반의 어린 시절>에서의 관계는 이반의 얼굴과 표정 그 하나로 모든 것이 이루어지고 상징이 되며, 결국 마지막 반전까지 성공적으로 이끌어내고 있다. 물론 타르코프스키의 영화는 지금 보면 조금은 투박하다. 영화를 제작한 시대적 배경과 기술적 한계로 인한 아쉬움은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다. 하지만 그의 시각에 비친 전쟁이란 시간적 공간이 아닌 마음속 공간임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분노한 소년, 아내를 잃고 폐허가 된 집을 청소하는 정신병 노인, 전쟁통에도 사랑이라는 감정을 놓치지 않는 대위, 전쟁에서만큼은 아이들과 여자들을 빼내고 싶어 하는 중위, 그리고 행복했던 이반의 어린 시절 회상 장면에 등장하는 가족들까지. 누가 보더라도 이 영화는 그가 자신만의 영상미학으로 인류에게 아픔의 상징으로 남아있는 전쟁에 관한 시를 지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도 분명히 이 영화를 보았을 것이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감독이 세상을 떠난 이후 많은 영화인들이 그의 영화를 오마쥬 하고 있다. 하지만 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 내내 떠나지 않는 영화 한 편이 있었다. 1928년 칼 테오도르 드레이어 감독이 만든 <잔다르크의 수난>이라는 작품이다. 혹시 타르코프스키는 <이반의 아린시절>에서 이 영화를 오마주 했던 건 아닐까?


La passion de Jeanne d'Arc (1928)


<잔다르크의 수난>은 1431년 프랑스 루앙에서 열렸던 ‘잔다르크의 종교재판 사건’을 바탕으로 만든 시대극으로 여주인공의 얼굴 클로즈업 기법이 유명한 흑백 무성영화다. 하지만 화재로 원본이 손실되면서 오랜 기간 모습을 보이지 않다가 1981년 기적적으로 재발견되면서 화제가 됐다. 타르코프스키가 1962년 전에 이 영화를 볼 수 있었다면 아마도 원본의 다른 판본들이 극장에서 상영된 것들 중 하나였을 것이다.


La passion de Jeanne d'Arc (1928)


<잔다르크의 수난>이 제시한 위대한 영화적 장치는 클로즈업이다. 감독은 처음엔 이 영화를 유성영화로 제작하고자 했지만 시스템이 안되어 부득불 흑백 무성영화로 만들어졌다. 하지만 이것이 신의 한 수가 되었다. 여주인공 마리아 팔코네티가 지닌 순수하고 두려운 그 표정 하나로 영화 자체를 완벽하게 해석해 냈기 때문이다. 마리아 팔코네티의 클로즈업 장면은 <이반의 어린 시절>에 등장하는 이반의 표정과 거의 흡사할 정도로 이미지가 강렬하다.



그리고 시적인 영상미학으로 인해 전달되는 정보가 제한적이라는 점도 비슷한 맥락을 지닌다. 그렇기 때문에 관객은 무엇보다 인물의 표정이나 행동에 집중해서 바라보게 될 수밖에 없으며, 침묵 속에서 자신의 언어로 그 침묵을 읽어내야만 한다. 평론가 앙드레 바쟁은 그 침묵을 “실질적으로 말하고 있는 무성영화”라 칭했다. 이반의 어린 시절이 등장하는 엔딩에서도 동일한 깊은 침묵이 나타난다. 결코 들리지 않는 신의 음성보다 그 안에서 조용히 투쟁하는 인간의 ‘열정적인 침묵’을 관객들에게 빠짐없이 전하려는 듯이.  



<잔 다르크의 수난>이 침묵이 무기인 무성영화의 장점을 완벽하게 살린 수작이라면 <이반의 어린 시절>은 유성영화의 장점 안에서 ‘말하지 않음의 미학’을 통해 영화적 한계를 극복하려 했던 타르코프스키만의 독특한 ‘예술세계’의 시작점이다.


그의 영화가 오늘날에도 최고의 감독들이 첨단제작 기술로 만드는 흥행작들과 매번 맞붙어도 승승장구할 수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건 단 하나. 대체할수 없는 그만의 영상미학이 영화 전편에 혈류처럼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마음으로 보는 눈 그리고 진짜 사진 <세상의 소금>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