듄 데 필라 (dune de pila) - 레자크 (Les Arc)
잠시지만 포트 와인에 취해 정신 못 차리던 우리 일행은 이제 포르투갈을 떠나 스페인 접경지역과 바스크 지역을 지나서 드디어 비옥한 옥토의 땅 프랑스로 진입한다. 프랑스라. 우리에겐 그나마 낯설지 않은 땅. 그전에도 이런저런 일로 프랑스는 여러 번 방문한 적이 있어서 매우 친숙한 느낌이다. 물론 기분 상 그렇다는 얘기지 뭐~
하지만 한 가지, 도로 상태가 캠핑여행을 하기에 가장 좋은 땅이 바로 프랑스다. 대부분의 고속도로가 무료이고 국도길이 거의 고속도로 수준으로 상태가 좋아 많은 운전자들이 선호하기 때문이다. 프랑스 남동쪽에서 보르도를 거쳐 파리로 향하기로 한 우리는 먼저 서해안 길을 따라 쭉 길을 잡았다.
그 첫 번째 타깃이 바로 아르카숑. 프랑스 와인의 생산지로 너무나 잘 알려진 보르도에서 기차로 불과 40분 거리에 있는 아르카숑은 듄 데 필라라고 하는 멋진 모래언덕을 가진 휴양도시다. 휴양객들을 위한 멋진 콘도, 골프장 그리고 인 라인 스케이트장으로 된 산책로, 카지노도 멋지지만 돈 들어가는 시설들은 애초부터 우리와는 상관없는 아이템이었기에 우리는 듄 데 필라를 둘러보고 프랑스 북쪽으로 올라가기로 일정을 잡았다.
듄 데 필라는 정말 멋진 경험이었다. 아르카숑이 자랑하는 웅장한 모래언덕 듄 데 필라는 유럽에서 가장 큰 모래언덕으로 길이 3km, 높이 104m, 넓이가 무려 500m나 된다. 우리가 이곳을 찾았을 때는 조금 늦은 철이어서 이동하는 철새들의 장관을 보지는 못했지만 끝없이 펼쳐진 모래언덕과 바다는 그동안 움츠렸던 가슴을 화악 트이게 하는 능력이 있었다.
시원한 바람이 우리를 연처럼 공중에 뜨게 한다. 친구 놈은 ‘나는 살아있다’라는 글씨를 모래 위에 써 놓고 어디론가 사라지고 나는 한동안 모래 바닥에 앉아 해변에서 패러글라이딩 하는 프랑스 노친네들을 바라보고 있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자유로움.
하지만 그렇게 쨍한 날씨를 보여주던 아르카숑에 저녁부터는 부슬부슬 비가 내린다. 이틀 동안 겨울비가 촉촉하게 내리는 작은 부둣가에서 캠핑을 한 우리는 다음날 전혀 일정에 없던 프랑스 알프스로 길을 떠나게 되었다. 파리에 있기로 한 친한 형님이 현재 프랑스 알프스의 스키캠프에 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부터 파리로 올라가려던 계획을 수정, 핸들을 돌려버린 것이다.
나는 최초의 계획을 생각하며 잠시 반대를 했지만 친구가 은근슬쩍 분위기를 잡으면서-거기를 가야 경비도 아끼고 얻어먹기도 수월하고 뭐 이런 것들로 유혹- 유도해 우린 결국 올라오던 길을 돌려 프랑스 알프스로 떠나게 되었다.
나는 스위스 알프스와 또 다른 프랑스 알프스는 어떤 모습일까 내심 궁금해하면서 한니발과 시이저 그리고 나폴레옹이 넘었을 그 험준한 산악의 웅장한 모습을 마음속에 떠올려 본다. 결심을 하자마자 신나게 달려 내려간 곳은 프랑스 중부의 알프스. 동계 올림픽을 치른 알베르 빌을 지나 부르고 생 모리스라는 산악 마을을 거쳐 2천600미터의 고지인 레자크까지 간다. 그런데 이 덩치 큰 캠핑카로 우리는 과연 2천 미터라는 높은 고지를 오를 수 있을까? 그것이 문제였다.
많은 사람들이 부르고 생 모리스 마을에 차를 주차하고 산악 협궤열차를 이용해 올라가는 레자크. 그게 아니면 차에 단단한 체인을 감고 올라가는 방법이 있었다. 우리가 도착한 시각은 밤 10시가 넘은 시각. 2천600 고지 협궤열차는 운행을 중단한 지 오래고 마을은 깊은 밤이라 정적에 휩싸여 있다. 마을에 차를 새워놓고 전화를 때린다. 형이 전화를 받다가 통화가 금세 끊어져 버린다.
헉! 어떡하지? 올라가 볼까? 올라가면 형 숙소에서 하룻밤 잘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일단 숨 가쁘게 찾아온 이곳에서 형을 만나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아졌다. 우리는 잠시 고민하다가 일단 올라가 보기로 했다. 아직 마을엔 눈이 내리지 않아 일단 차를 가지고 레자크까지 올라가기로 결정했지만 그건 명백한 실수였다. 중간중간 눈에 덮인 지역을 통과하니 아뿔싸~ 정상엔 이미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큰 눈이 내리고 있다.
마을 밑에서 대충 고지대려니 상상하고서 체인도 없이 이곳을 올라온 것이 금방 후회가 되었다. 차는 비뚤 빼뚤하며 조금씩 밀리기 시작하고 심지어 옆으로 뒤로 미끄러지기까지 했다. 다들 조용했지만 속으로 기겁을 하고 가슴이 철렁한다. 그리고 맘속으로 불만이 터져 나왔다.
‘ 이런.. 젠장... 그러니까 올라오지 말자니까...‘
이렇게 날씨가 추운 것을 감안하면 곧 길이 얼을 텐데 그럼 꼼짝없이 우린 길에 갇히는 꼴이 된다. 그러다가 미끄러지기라도 한다면 천 길 낭떠러지로 떨어질 수도 있는 참혹한 상황. 그때였다. “ 웽웽~” 길 위에서 사이렌 소리가 나면서 제설차량이 힘차게 내려온다. 오 주여~ 우리를 버리지 않으셨나이까. 체인 없이 올라오는 차들을 위해 갑자기 폭설이 내리면 출동하는 긴급 제설차였다.
아무도 없는 야밤에 제설차가 다니다니 우린 이구동성으로 만세를 외치면서 감동 먹고 있었다. 정말 대단한 사람들이다. 제설차가 지나가자 도로엔 말끔히 눈이 치워지고 그 덕에 우린 쉽게 정상에 오를 수 있었다. 2천6백 미터 고지에 올라와 눈으로 가득한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형에게 연락을 해봤지만 이미 하루 종일 스키 타기에 지친 형의 휴대폰은 감감무소식. 필시 곯아떨어졌나 보다. 우리는 할 수 없이 캠핑카에서 이 추운 알프스의 밤을 보내야 했는데 일은 그때 제대로 터졌다.
때맞춰 캠핑카의 보일러가 고장을 일으킨 것이다. 때는 본격적인 겨울. 여름에도 설운이 감도는 이 높은 고지에 눈까지 내리고 캠핑카는 보일러까지 고장 났다. 미끄러져 산에서 굴러 떨어지는 악몽 속에서 겨우 살아나니 곧 얼어 죽을 판이었다. 그러자 이곳까지 차를 끌고 온 책임공방에 잠시 차 안이 어수선해졌다. 니가 잘했니 내가 잘했니. 하지만 그것 역시 난세 타계에 별 도움이 되질 않고 차 안으로 냉기가 슬슬 밀려들어 오면서 우리는 다시 하나가 되어 갖은 아이디어를 다 동원해 추위와 맞서야 했다.
다시는 이 높은 고지에 캠핑카를 끌고 오지 않기로 다짐하며( 어떻게 맨날 다짐만 하면서 그토록 상식을 지키지 않았던 것일까. 그게 궁금할 뿐이다 ^^;) 남아있던 전기로 밥솥에 있는 물을 끓이며 그 수증기로 공기를 데우고 포르투갈에서 가져온 나머지 포트와인을 따서 냉랭해지는 몸속으로 왈칵 들이켰다.
와인이 들어가자 몸이 노곤 해 진다. 좀 전까지 네가 잘했니 하면서 윽박지르던 일행들도 조용히 눈을 붙인다. 켜켜이 껴입은 침낭 안에서 깊은 추위를 뼛속으로 느끼며 잠 속으로 빠져든다. 그날 밤 난 그 추운 침낭 안에서 생뚱맞게도 발디제르 정상에서 스키를 타고 신나게 내려오는 즐거운 꿈을 꾸고 있었다. 술에 취한 상태에서도 얼어 죽지 않으려고 손끝과 발끝을 꼼지락거리며 생사확인을 하는 사이, 우린 깊은 꿈나라로 달려가고 있었다.
그 날 그렇게 추운 밤을 고통스럽게 보내고 2천6백 미터 고지에서 환하게 밝아오는 새벽 알프스를 바라봤을 때 우린 벅찬 감동을 느꼈다. “ 야,, 살아있네” 이것이 진정한 겨울이구나 하는 그런 감탄과 환희. 어젯밤 있었던 어색했던 감정들은 온데간데없이 겨울 산에 얼어붙어 사라지고 없었다. 도대체가 캠핑카가 아니면 어떻게 이런 경험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생뚱맞은 생각을 하며 그 새벽, 아들의 손을 잡고 3천 미터 고지로 트랙킹을 하는 가족을 바라보며 한없는 부러움을 느꼈다. 그때서야 저기 멀리 레자크 산장에서 반가운 한 명의 한국인이 손을 흔들며 달려 내려오고 있었다.
“야 인마.. 니들 미쳤냐!!! 여기가 어디라고 캠핑카를 끌고 와.... 아이고~ 이 웬수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