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다모토리 Mar 04. 2020

49. 7번 국도 양양 해변_그대, 바다로 떠나라

CHAPTER 3. 바다가 내어준 푸른빛 길 (속초-묵호)


속초에서 양양을 가기 위해 9번 버스에 올랐다. 버스는 시내를 벗어나 이제 동해를 타고 흐르는 7번 국도 위를 미끄러지듯이 달린다. 항구에서 태어나고 자란 나에게 동해바다는 특별한 기억을 가지게 해 준 숙명적인 존재였다.



푸른색을 좋아하는 소년이 있었다. 바다는 눈동자를 가진 소년이 제일 처음 태어나 놀랍도록 처절하게 바라본 대상이었다. 거기엔 그물에 걸려 나온 고기들과 조그만 통통배들이 있었고 까마득히 멀리 파란 바다는 파란 하늘과 맞붙어 있었다. 나의 바다에 대한 유년의 기억은 나의 주변, 생존 그 자체였다.


바다에 대한 나의 기억은 나의 일생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 나의 가족들은 바다로 인해 생존에 필요한 모든 정보를 얻었으며 그 바다로 인해 가계의 운영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바다는 농부의 땅과도 같은 존재이다. 내가 사는 모든 마을의 집들은 모두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으며 나는 어디든지 그 마당 안에서 손쉽게 바다를 볼 수 있었다.



할아버지와 함께 조그만 나룻배를 타고 꽁치잡이를 나갔던 기억. 찰랑이는 바다 물결에 보잘것없는 나룻배는 심하게 흔들렸지만, 할아버지의 꽁치잡이는 이미 바다와 함께 친숙해져 있었다. 나는 파도의 어울림을 따라 흔들거리던 할아버지의 리듬을 아직도 기억한다. 맞서지 않고 동화되며 바람과 물결에 못 이기는 척 져주던 할아버지의 그 노 저음.


그러나 바다는 난폭하다. 생존에 두 눈을 부릅뜨고 나서는 사람들을 집어삼키고 해류를 바꾸어 조그만 어촌을 고립시키기도 한다. 동네 사람들은 바다를 두려워했고 또 떠나고자 했다. 어판장에서 바라본 바다는 삶의 현장이었다. 어린 나는 바다가 아름답고 환상적이며 시적이라는 표현을 이해할 수 없었다. 바다는 내게 삶의 경계이면서 놓칠 수 없는 유년의 끈끈한 흔적이었다.



이제 소년은 바다를 떠났다. 뭍으로 들어왔다. 뭍은 바다를 잊게 해 주었다. 가끔씩 보는 바다는 추억의 바다가 되어 있었으며 지나간 회상을 기억해 주는 블루스크린이 되어 있었다. 뤽 베송의 '그랑블루'를 보고 나서 한동안 좌석에서 일어날 수 없었던 것은 에릭 세라의 찬란한 음악에도 이유가 있지만 마지막 주인공이 바다에서 돌고래의 환영을 보고 로프를 잡고 있던 손을 놓는 순간의 감동을 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의 나에게 바다는 환영이다. 보일 듯 말듯한 기억들과 기대 그리고 기쁨과 절망의 나락을 기억해 주는 트레이싱 페이퍼다. 나는 그 위에 가끔 먹줄을 대고 금을 긋는다. 나에게 뿌려지는 저 파도는 마치 내가 내뱉는 회한의 감정들 같다. 그 덕분에 인간들과의 경계는 모호해지고 삶의 기대는 잠깐이지만 바다에선 무력화된다. 그렇게 바다는 내게 있어 영원한 기억의 안식처이자 동반자였다.



고향의 바다를 등지며 생각한다. 정리를 하고 싶다면 여행을 떠나라. 정리가 되었다면 여행을 떠나라. 이도 저도 아니고 개념 없이 산다면 여행을 떠나라. 아무것도 없지만 여행은 당신의 지치고 고단한 정신적 충격을 조금은 덜어준다. 하늘과 바다를 보는 것만으로도 여행은 가치가 있다. 그곳이 어디이든 간에 자신에게 속삭이며 혼자 할 수 있는 여행이라면 더욱 좋다. 열심히 일한 당신만 떠나라고 속삭이는 골 빈 똥통들 사이에서 지금 떠나야 한다. 그것만이 살만한 내 마음속 세상을 만드는 소중한 사치이기 때문이다.

#버스오딧세이 #속초_양양_9번버스

매거진의 이전글 48. 속초를 스치며(3)_완벽한 타인의 땅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