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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모토리 Mar 06. 2020

58. 옥계-동해_시내버스의 기원을 찾아서

CHAPTER 3. 바다가 내어준 푸른빛 길 (속초-묵호)


시내버스 여행의 장점은 단출한 행장 차림으로 아무 때나 원하는 시간에 움직일 수 있다는 데 있다. 운전면허를 평생 단 한 번도 따 보려는 시도를 해 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매일 일상 속에서 대중교통을 이용해야 한다. 나 같은 뚜벅이들을 먹여 살리는 이런 버스야 말로 생명줄과도 같은 존재다.



동해로 가는 32-1번 버스 창가로 시원한 바다가 나를 반긴다. 한가한 틈을 즐기다가 문득 이번 여행의 화두인 시내버스란 단어에 집중해 본다. 시내버스는 말 그대로 시내를 다니는 버스다. 사전적으로는 대도시와 주요 도시의 지역을 서로 연결해서 운행하는 버스라고 나온다. 이런 시내버스는 형태에 따라 간선, 지선, 마을버스로 나뉘고 운행에 따라 일반, 농어촌, 급행, 순환버스 등으로 구분된다. 이런 설명을 보면 시내버스를 타고 전국을 한 바퀴 도는 것은 전혀 불가능하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예외 없는 법칙이 없듯이 두메산골 오지 어디에서 멀쩡하던 버스 노선이 짠하고 사라질지 아무도 모른다. 그저 여행기간 중에 버스노선이 끊기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기왕 말이 나온 김에 조금 더 부언하면, 우리나라에서 시내버스가 처음 운행된 곳은 서울이 아닌 대구였다. 우리나라의 첫 시내버스는 1920년 7월 1일 경상북도 대구부에서 국내 최초로 운행되었다. 당시 대구 호텔 주인이었던 ‘베이무라 다마치로’라는 일본인이 버스 4대를 들여와 대구에서 시내버스 영업을 처음으로 시작했다. 이 버스는 전차와 달리 정류장이 아닌 곳에서도 누구나 손을 들면 태워줬기 때문에 인기가 많았다고 한다. 하지만 전차보다 비싼 7전이란 요금 때문에 시민들이 외면했고 결국 버스 운영권이 경성전기 주식회사로 넘어간다.



그 뒤 1928년에 경성부 부영버스가 최초로 운행되었는데 초기에는 버스보다 마차에 가까운 모양새였다. 하지만 이 버스 역시 부족한 노선과 비싼 요금 때문에 시민들이 외면했고 대구처럼 1932년 전차 운영업체인 경성전기에 인수돼 전차의 보조수단으로 이용되는데 그친다. 이후 한국 전쟁을 거치고 1960년대 중반까지 마이크로버스와 미군 트럭을 개조한 시내버스가 시내를 활발하게 누비며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그렇다면 이런 시내버스는 세계에서 누가 최초로 고안해냈을까. 인류 최초로 버스를 제안한 사람은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로 유명한 17세기 프랑스의 철학자 파스칼이다. 평소에 배려심이 많았던 그는 아침마다 일터로 나가는 파리의 시민들이 다 함께 타고 다닐 수 있는 값싼 수송수단은 없을까 라는 고민을 하다가, 1661년 여러 대의 마차를 연결해 파리 시내의 정기노선을 순환 운행하고, 요금은 1인당 5수(sous·구 프랑스 화폐)를 받자는 놀라운 제안을 한다.



이렇게 시작된 승합 마차 아이디어로 파리에서 최초의 버스회사가 탄생된다. 1662년 3월, 드디어 서민들이 탈 수 있는 승합 마차들이 파리 시내를 달리게 되었다. 하지만 이런 파스칼의 시내버스는 큰 인기를 얻었지만 1680년경 영업부진으로 폐지되기에 이른다.


그로부터 150년이 지난 1826년 파리의 온천 목욕탕 주인인 스타니슬라 보드리에라는 사람이 파스칼의 아이디어를 화려하게 부활시킨다. 그는 시 외곽에 대중목욕탕을 만들고 도심에서 손님들을 실어 나르는 마차를 운행했는데 중간에 내리려는 승객이 많은 점에 착안, 여관과 주요 지점을 거치는 코스를 개설하고 승객과 우편을 원하는 장소까지 운송했다. 요즘으로 치면 시내버스와 관광버스를 적당히 합친 형태의 노선버스를 개설한 것이다. 이후 그는 1828년 파리로 가서 본격적인 버스회사를 설립한다. 자신이 운영하던 온천 마차의 종점에 있던 모자가게 간판인 옴니버스를 명칭으로 사용했는데,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버스(bus)의 전신이다.



이렇게 역사의 흔적을 남기며 발전해 온 시내버스는 우리 세대에게도 특별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386세대라고 하는 80~90년대 학번들은 대부분 시내버스에 대한 애틋한 추억들을 지니고 있다. 1984년에 버스 안내양 제도가 없어졌으니 이 시대에 학창 시절을 보낸 이들에겐 교복과 안내양이 있던 시내버스가 추억으로 진하게 남아있을 것이다.


나의 첫 시내버스 탑승 추억은 초등학교 시절, 강원도 고성군 산골짜기 동네인 간성읍에서 거진읍을 왕래하던 프런트 엔진 방식의 늘씬한 시제품 시내버스였다. 이 버스가 마을 신작로에 들어서면 얼마나 타고 싶었는지 동네 친구들이 삼삼오오 몰려들었다. 그리곤 50원짜리 동전 하나를 내고 일부러 그 버스를 타고 간성 읍내까지 나가서 목욕을 하고 돌아오던 기억이 난다.



그뿐인가, 중학교 1학년 때 당시 등교버스에 가득한 학생들에게는 무언의 법칙이 하나 있었다. 앞자리는 여학생들이, 뒷자리는 남학생들이 타는 불문율이었다. 첫 등교를 하며 이런 불문율을 모르고 냉큼 앞자리에 앉은 나는 결국 상급생 누나들이 에워싸고 내려주지 않는 바람에 몇 정거장이나 더 먼 여중학교 앞에서 징징거리며 내려야 했던 기억이 난다. 당시 당황한 나를 보고 깨알같이 웃던 그녀들이 갑자기 보고 싶어 졌다. 덜컹거리는 버스 안에서 잠시 시간을 뒤로 돌려 애틋한 추억에 잠겼다 깨어나니 버스는 어느새 묵호시장에 다다르고 있었다. 자, 또 여행을 시작해봐야지.


#버스오딧세이 #옥계_동해_32_1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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