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5. 보부상의 애환이 서린 발품 길 (영주-대구)
봉화에서 춘양, 광비에서 36번 국도를 따라 울진으로 향한다. 중간쯤 가다 보면 금강송 휴게소에서 좌측으로 올라가는 막다른 도로가 나온다. 그 유명한 십이령길 12고개 중 네 고개를 옛길 그대로 걸으면서 체험하는 ‘금강소나무숲길’의 종점 소광리로 가는 길목이다.
그 옛날 울진에서 봉화까지 보부상과 선질꾼들이 행상할 때 넘던 고개가 12개여서 붙여진 십이령길은 1980년대 초 불영계곡을 관통하는 36번 국도가 개통되기 전까지는 울진과 봉화를 동서로 연결하는 유일한 길이었다. 이 길은 일제강점기 전에는 보부상들이, 이후엔 조직 없이 홀로 짐만 져 나르는 바지게꾼(선질꾼)들이 울진에서 이 열두 고개를 넘어 봉화까지 무려 150리가 넘는 길을 오가며 장사를 했던 삶의 무대였다.
지금이야 500년이 넘는 금강소나무 솔향을 맡으며 유유자적 걷는 길이 되었지만 옛날엔 앉지도 못하고 서서 쉬며 만 6일을 종횡무진 달려야 하는 고난의 장사길이었다. 게다가 이 고개들은 산세가 험해 밤에는 넘지 못했다. 대낮에도 맹수나 도적의 출몰로 많은 피해를 입어 행상들이 두천 원주막에 모여 하룻밤을 자면서 큰 무리를 지어 함께 넘었다고 한다. 물론 그게 끝이 아니었다. 봉화에 도착한 보부상들은 내성장, 춘양장, 법전장 등을 돌며 필요한 물건을 물물 교환했는데, 이 여정까지 합치면 족히 10일이 넘게 걸렸다.
울진의 보부상들은 소금, 미역, 은어, 대게 등을 울진 부구 장터에서 짊어지고 열두 고개를 넘어 봉화 내성장 등에 내다 팔고, 곡식이나 의약품을 사서 돌아갔다. 되돌아올 때, 산적이나 짐승에게 해를 입는 경우도 다반사였다. 당시 지게꾼들이 이고 지고 가던 물산 중에 가장 귀한 건 소금이었다. 울진에서 바닷물을 모래톱에 들여와 전통적인 염전 방식으로 추출한 소금 토염이다. 이젠 너무 귀해져 ‘황금 소금’이라고 불리던 이 소금은 일제시대 말기 같은 넓이의 토지에서 지은 쌀농사에 비해 무려 3배 정도의 소득을 올릴 수 있었다.
당시 귀한 소금을 지고 다니던 보부상의 등짐은 해방 이후엔 개인택배 기사라 할 수 있는 선질꾼들이 도맡아서 날랐다. 물론 과거로 시간을 꽤나 돌리면 이 길에는 암행어사와 과거시험을 보러 한양 가는 선비들도 등장한다. 그 옛날, 땀과 눈물이 배인 이 고개를 넘나 들며 인생을 꿈꾸던 이들의 삶의 무게는 어느 정도였을까. 선친이 직접 선질꾼을 했고, 본인 역시 그들의 삶을 지켜봤다는 이상휘(86) 할아버지의 말이다.
“내가 어릴 적 본 선질꾼들의 등짐 무게는 대략 40㎏정도 됐을 겁니다. 그런데 선질꾼들은 노인네들이 많았어요. 휘청휘청하면서도 그 무게를 감당해내며 12고개를 넘어 다녔죠. 내가 생각해도 정말 징하요. 하긴 그 사람들 내가 잘 아는데, 삶이 무겁다고 아무 데나 털썩 내려놓는 그런 사람들은 아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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