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의 신부가 받는 바로 그 음식
지금으로부터 15여 년 전, 대학 선배 언니가 졸업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일찍 시집을 가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결혼식에서 친한 동기가 부신부(제주에서 신부 옆에서 결혼의 모든 진행과정을 맡아하는 가장 친한 친구)를 맡게 되었는데, 그 친구가 내게 결혼식을 도와달라며, 이틀 치 짐을 싸서 집 앞에서 대기하라고 연락이 왔다. 아침 일찍 결혼식 하객 옷까지 챙긴 배낭을 짊어지고 집 앞에 서 있으니 승합차 한 대가 집 앞에 멈춰 섰는데, 차 안을 들여다보니 대학 동기와 선배들이 이미 한 차 가득 타고 있었다. 그렇게 우리를 태운 차는 제주시를 출발하여 산방산 아랫자락 사계리의 한 집 앞에서 멈춰 섰다. 바로 그 사계리의 집에서 이틀간 여정은 시작되었다.
우리는 바로 작업복(?)으로 환복하여 한 팀은 서빙을, 한 팀은 삼촌들의 부름씨(심부름꾼)를, 한 팀은 부신부 옆에서 부신부를 도우며 정신없는 하루를 보냈다. 저녁에는 부신부가 지정해 준 방에 모여 숙취해소제에 손수건을 감싸 돌돌 말면서 내일 아침에 있을 결전의 날을 대비하며 첫 번째 밤을 보냈다. 다음날 아침, 신랑이 신부를 데리러 신부집에 왔고 우리들은 신랑과 신랑 친구들을 위한 신랑상이 차려진 방에서 그들을 맞이했다. 그리고 온갖 수난(?)을 겪으며 준비한 손수건을 전부 팔았다. 한바탕 떠들썩한 아침을 보내고 웨딩홀로 이동하고 나서야 이틀 만에 공식적으로 신부의 얼굴을 보게 되었다. 결혼식이 끝난 후 신부와 함께 신랑 집에 갔더니 아침과 같이 제주의 산해진미가 상다리가 부러질 정도로 차려진 신부상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신부상 가운데에는 꽃닭이 어여쁜 자태를 뽐내고 있었는데 마치 아침 내내 수모(?)를 겪은 우리를 반겨주고 위로해주는 느낌이었다.
여기까지가 2006년, 내가 기억하고 있는 결혼식 중 마지막으로 집에서 치러진 결혼식, 즉 마지막 “가문잔치”의 기억이다.
물론 그 이후에도 촌에서 결혼한 친구와 지인들도 있었고, 간혹 내가 그들의 부신부를 맡기도 했으며, 신부상을 몇 번 접해보기도 했다. 그러나 2006년 사계리의 결혼식이 집에서 돼지를 직접 잡아 가문잔치를 하고 마을 사람들이 함께 음식을 준비하고, 신랑상 신부상을 차리고 받으며 신부보다 더 바쁜 신부 친구의 역할을 했던 마지막 기억이었다.
이 음식은 2000년 초반 이후 거의 보지 못했던 음식이었고 음식의 이름도 정확히 몰랐었다. 그래서 그 이후부터 지금까지 나는 여러 삼춘들과 할망들을 만나게 되면 신부상에 올라가는 그 음식의 이름을 꼭 물어본다. 어르신들의 대답은 “계란 돈가스”. “덴푸라”, “돈가스”, “계란 튀김” 등 다양했지만 사실 가장 많이 돌아왔던 대답은 이거였다. “게매이(글쎄).....” 정확한 이름도 없고 그나마 할망들이 부른 이름도 이 음식의 정체성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하는 것 같아 나는 일단 이 음식의 이름을 “독새기고기튀김”이라고 명명했다. 그리고는 내 추억 속에 들어가 아주 희미해져 있던 이 음식을 다시 세상 밖으로 꺼내며 수업으로, 간식으로, 도시락으로, 행사용 음식으로 만들게 되었다. 30대부터 50대의 제주사람들은 내가 만든 “독새기고기튀김”을 먹으며 나처럼 잊고 있었던 추억상자를 찾은 듯 행복해하고 즐거워하며 이 음식에 대한 추억담을 하나씩 꺼내놓았다.
30대부터 50대 사이 대다수 제주 토박이들은 어린 시절, 신부상위에 그 맛있는 음식이 나의 입까지 오길 기다리며 그 근처를 기웃기웃거렸던 추억이 있을 것이다. 그런 추억이 듬뿍 담겨있는 “독새기고기튀김”은 사실 제주에서 아주 오래전부터 만들어먹었던 제주 전통음식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본래 일제강점기 이전 제주 전통 조리법 중 튀김음식은 거의 없었다. 제주에서 기름을 이용한 조리법은 돗지름(돼지기름)과 노물지름(유채기름)이 보편화되면서 시작됐다고 추측해볼 수 있다. 여기에 콩기름이 보급되면서 튀기는 조리법이 더욱 널리 퍼졌다고 가정한다면 삶은 달걀에 돼지고기 완자를 감싸 기름에 튀긴 이 음식, 즉, 삼촌들이 말하는 “계란 돈가스”는 사실 그 역사가 그리 길지 않을 이다. 이는 더 윗세대에게 물어보면 금방 유추해 볼 수 있다. 60대 이상의 할망들에게 본인들이 받은 신부상을 떠올려 보라고 부탁드리면 신부상 위 이 “계란 돈가스”는 “삶은 달걀 세 개”로 대체된다. 정확히 이야기하면 “삶은 달걀 세 개”가 튀김유가 보편화되면서 “계란 돈가스”로 대체된 신부상도 있고, 이 두 개를 함께 올리는 신부상도 등장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신부상에 이 달걀, 그러니까 삶은 달걀 세 개를 꼭 올렸던 이유는 무엇일까? 제주가 신들의 섬, 신화의 섬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면 이 해답의 열쇠를 금방 찾을 수 있다. 나는 웨딩홀에서 치르는 예식이 보편화되기 전, 그러니까 1960년대부터 1970년대 초 사이가 제주에서 유교적 혼례와 서양식 혼례가 혼재된 과도기적 시기라고 본다. 이 시기에 가문잔치를 하신 어르신(소길리 양태경 어르신, 1944년생)의 말에 따르면 제주의 혼례 당일 일정은 다음과 같다. 우선, 혼례식 날 아침에 신랑 집에서 문전 코시를 치른다. 문전 코시가 끝나면 신랑이 신부를 데리러 가는데 이로써 본격적인 혼인식이 시작되는 것이다. 주지하듯이, 문전 코시는 제주의 집에 있는 문전신을 위한 것이다. 조상에게 드리는 제례가 아니라 문전본풀이의 녹디생이, 즉 문전신에게 드리는 제이며, 이를 시작으로 결혼식 당일 본격적인 행사가 시작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신화적 요소는 신부상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제주한라대학교의 오영주 교수님의 연구에 따르면 신부상의 “삶은 달걀 세 개”는 일뤳신에게 바치는 제물이라고 한다. 일뤳신은 일뤠중저, 일뤠할망이라고도 불리는 신으로 아이의 출산과 성장을 돌보는 신이다. 바로 이 일뤳신에게 올리는 삶은 달걀 세 개는 달걀흰자 표면처럼 하얗고 매끈한 피부를 가진, 즉, 피부병을 앓지 않는 아이를 출산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올리는 것이라고 한다. 세 개를 올리기도, 다섯 개를 올리기도 하는데 그 숫자는 지역이나 가정에 따라서 달랐던 것 같다. 내가 만난 어르신 중에는 최대 아홉 개를 올렸다고 한 어르신도 있는 것으로 보아 꼭 “삶은 달걀 세 개”가 원칙은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삶은 달걀 세 개”는 가문잔치의 꽃, 신부상에만 오르는 걸까? 그건 아닌 것 같다. 병환이 있는 분을 위한 굿을 몇 번 참관한 적이 있는데 그 상에도 삶은 달걀 세 개가 올라가 있었다. 또 신들을 위한 제상 위에서도 삶은 달걀을 보는 일이 어렵지 않다. 이는 일뤠할망이 산육(産育) 뿐 아니라 제주의 지리와 기후에서 오는 풍토병을 치유해 주는 치병신으로서 역할을 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만큼 제주 사람들에게 삶은 달걀은 여러모로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또 신부상에서 음식을 조금씩 뜯어 상 아래 두는데 그 음식은 문전본풀이에 나오는 측간신, 노일제대귀일의 딸에게 이 결혼을 훼방 놓지 말라고 주는 음식이라고 한다. 제주의 가문잔치는 이미 추억이 되었다. 제주의 어르신들에게는 괴깃반과 함께 돼지육수를 이용해 만든 몸국, 놈삐국, 배춧국, 좁짝뼈국, 또는 간혹 고기국수를 떠올리는 추억의 옛이야기가 되었다. 한편, 제주의 청․장년들에게는 “그거 하나!” 꼭 얻어먹고 싶은 음식인 “계란 돈가스”를 떠올리게 한다. 그렇게 보면 “계란 돈가스”는 제주의 청장년층에게 희미하게나마 제주의 가문잔치를 떠올리게 하는 단 하나의 음식이 아닐까?
과거 7일 동안 치렀다고 해서 일뤳잔치라고도 했던 제주의 가문잔치는 요즘 사람들에게는 삼일 잔치로 알려져 있는 듯하다. 그런 삼일 잔치가 이틀 잔치로 축소되고, 최근에는 당일 잔치로 대폭 축소되었다. 이는 고작 10년 사이에 일어난 일이다. 당일에라도 솔문을 세우고, 신랑상 신부상을 다시 부활시키고, 넉둥배기(제주식윷놀이)로 축제 분위기를 돋우는 그런 제주만의 결혼문화가 제주 사람들 사이에서 유행처럼 다시 번지면 얼마나 좋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