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보니 편집자

팔자에도 없던 편집자가 되다

by kotobadesign


출판 편집자.

나와는 먼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나는 건축을 전공했고 인테리어 분야에서 일을 한 완전한 이과생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내가 지금은 완벽하게 문과생이 되어 편집과 번역을 하고 있다.

인생은 정말 어디로 굴러갈지 아무도 모른다는 걸 어떤 전환의 순간마다 느낀다.




책을 좋아해 20대에는 문학, 역사, 경제 등 분야 상관없이 잡식 독서를 했다.

예전에 내 꿈이 집 한쪽 벽면을 다 책으로 꾸미는 것이었으니 그만큼 책도 많았다.(지금은 필요한 책만 적게 소유한다.) 그렇게 책에 둘러싸여 있었지만 책을 만드는 일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던 것 같다.

다만 건축을 공부하고 긴 시간 인테리어를 하면서 나는 내가 직접 디자인하는 것보다 누군가가 잘 만든 공간을 소개하고 이야기하는 것을 더 좋아한다는 것은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그러다가 몸이 안 좋아져 회사를 휴직하고 그것을 계기로 일본에 가게 되면서 나는 이과에서 문과로 완전히 바뀌었다. 일본에서는 일본어와 통번역을 공부했고 한국에 들어와서는 출판 번역을 공부했다.

이후 번역가로 활동하며 여러 출판사에 일본 책 번역 기획서를 돌리다가 얼마 전까지 일했던 출판사의 주간님과 인연이 닿아 4-5년은 알고 지냈던 것 같다. 그리고 오래 걸렸지만 그 출판사에서 직접 기획한 책으로 번역가로 데뷔했다.

번역서가 출간된 당시는 도쿄 한 달 살기를 위해 서울 집을 정리하고 부모님 댁에서 지낸 지 1년 정도 된 시점이었다. 도쿄도 갔다 왔겠다 이제 슬슬 서울로 돌아가야지 하며 올라갈 구실을 찾고 있을 때였다.

그런데 마침 주간님께서 편집자로 일해볼 생각 없느냐는 제안을 해주셨다.

사실 처음 받는 제안은 아니었고 그 1년 전에도 비슷한 제안을 받았지만 그때는 흐지부지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바로 결정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망설여지는 부분이 없었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일단은 그때까지의 여러 상황을 봤을 때 일이 엄청 많을 것 같았고(일을 엄청 많이 시킬 것 같았고) 내가 할 거라고 전혀 상상하지 못한(가능할 것이라고도 생각 못 한) 일이었기 때문에 걱정도 많았다. 그래서 주변에 편집자로 일했던 친구나 대학 동기에게 조언을 구했는데 다들 일관되게 이렇게 이야기했다.


'뭐가 걱정이야. 한 번 해보는 거지.'


그랬다. 나한테 이런 기회가 올 거라고는 생각을 못 했고 그 기회가 왔을 때 일단은 잡아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내가 언제 편집자를 해볼 기회를 얻겠는가. 아니다 싶으면 그만두면 된다. 일단은 편하게 생각하자!

분명 주간님도 몇 년 동안 나를 봐오기는 했지만 편집 경력이 없는 사람을 데려오려고 하니 불안한 구석도 있었을 것이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인데 내 번역서를 담당했던 편집자가 그만두게 되면서 공석이 생겼고

주간님은 일단 내가 후보로 있긴 했지만 확신이 없는 상태였다고 했다.

그런데 그 편집자분이 '함께 일해보니 하나 님이 하시면 잘하실 것 같다.'라는 이야기를 해주어 나에게 제안하게 된 것. 이후에 나를 밀어준 편집자분은 자기 대신에 들어와 너무 힘들게 일한 것 같아, 조금 거칠게 말하면 날 박아놓고 자기가 나가게 된 것 같아 정말 미안했다는 이야기를 만날 때마다 했다.

하지만 그건 내가 선택한 일이었고 일은 힘들었지만 새로운 경험을 하게 해주었으니 나는 오히려 그분께 감사하다고 해야 하는 게 맞다. 그리고 회사 다닐 때는 정말 많이 부딪혔을지언정 불안한 면이 있었는데도 나에게 제안해주신 주간님께도 감사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나는 부모님 댁에서의 생활을 후다닥 정리하고 다시 집을 구해 파주로 출근하며 편집자가 되었다.

그 이후에 어떻게 되었냐고?

의외로 편집자 일은 나에게 잘 맞아 빛의 속도로 적응했고 저자, 역자와 소통하면서 책 전체를 구성해 만들어가는 일이 재미있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정말 재미있게 팀원들을 이끌며 잘해나갔던 것 같다. 그랬던 것이....(이후는 말하지 않아도...) 회사를 다닌 20개월 동안 20권의 책을 만들어내는 기염(?)을 토하며 빠르게 나 자신은 정신적 육체적으로 소진되었다. (보통 1년에 편집자 한 사람당 5-6권의 책을 만든다는 사실을 퇴사한 뒤에야 알았다.) 스트레스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고 인테리어 했을 때보다 더 힘들다는 이야기를 밥먹듯이 하며 살았다. 하지만 어찌 되었든 빠르고 완성도 있게 책 만드는 것을 배우고 해온 덕분에 지금은 내 짧은 편집자 이력에 비해 많은 책 작업이 경력으로 쌓였다. 그리고 얼마 전 새로 들어가는 프로젝트를 위해 출판 이력을 보내야 할 때 좋은 역할을 해주었으니 그 시간이 헛되지만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당시에는 끊임없이 쌓여 있는 원고에 이대로 파묻혀 죽는 것은 아닐까 싶었다. 그리고 정말 힘들었던 시기에는 파주행 셔틀버스를 타고 출근할 때마다 마치 머리채 잡혀 끌려가는 기분이었고 이 이야기를 동료들에게 우스개소리로 하자 그들의 웃픈 웃음 뒤로 침묵이 흘렀다.




나는 정말 어쩌다 보니 편집자가 되었다고 해야 맞을 것이다.

막연하게 출판사에서 일해보고 싶다는 생각은 한 적 있었지만 실제로 나에게 그런 기회가 올 줄은 생각도 못 했고 전혀 다른 분야에서 일하면서 가끔은 이게 꿈인가? 하고 현실감을 잠시 잃기도 했다.

어떻게 보면 너무 쉽게 편집자가 된 것 같아 출판사에 들어가기 위해 열심히 준비하는 분들에게는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그리고 정말 기획을 잘하고 멋진 편집자들을 볼 때는 주눅이 들어 나는 편집자 축에도 들지 못한다고 자괴감에 빠질 때도 많다.


그렇더라도 편집자 경력은 나에게 많은 것을 주었다.

책을 만드는 경험과 기쁨에 대해 알려주었고 힘들게 만든 책이 독자의 손에 닿았을 때의 애틋함, 뿌듯함도 알려주었다. 지금도 프리랜서 편집자로 일하고 있는 나는 한 곳에서만 편집자로 일해보았기 때문에 다른 출판사에서 일해보고 싶다는 마음을 한편에 두고 일단 지금은 단행본은 물론 거기에서 조금 범위를 확장한 여러 책을 만들고 있다. 그리고 번역가였을 때는 하지 못했던 책을 '만드는' 것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되었다.


편집자 이전의 내 목표는 '10년 후에도 번역가'였다. 하지만 이제는 여기에 하나가 더 추가되었다.

'10년 후에도 번역가, 출판기획편집자'

나에게 어떤 기회가 또 오고 어떤 책을 내가 번역하고 기획하고 만들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목표로 밀고 나가려고 한다. 어쩌다 보니 편집자가 되었지만 인생은 어쩌다 보니 그렇게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굴러갈 때도 있다. 그리고 그렇게 굴러가 닿은 곳에서 주어진 기회에 감사하고 그것을 더 살리기 위해 노력하며 살면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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