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적인 사물들]부츠에 이렇게까지 할 일?

매일의 글쓰기 12

by kotobadesign

겨울을 좋아한다.

초여름에 태어났음에도 겨울을 좋아해 겨울이 오면 행복하고 겨울이 끝날 즈음이 되면 우울해진다.

겨울을 손꼽아 기다리는 이유는 여럿 있다.

볼이 찢어질 것 같은 차가운 바람으로 머릿속이 선명해지는 것을 좋아한다.

추운 곳에 있다가 따뜻한 곳에 들어가 앉으면 느낄 수 있는 노곤함도 좋아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좋아하는 니트와 코트를 입고 부츠를 신을 수 있다는 것.

계절이 늦가을로 접어들면 드디어 부츠를 신을 수 있는 계절이 왔다며 속으로 덩실덩실 춤을 춘다.

그리고 열심히 부츠를 신고 돌아다닌다.




나에게는 기억에 남는 부츠들이 있다.

정말 오래전에 런던에 혼자 여행을 간 적이 있었는데 그때 빈티지 마켓에서 한눈에 반한 부츠가 있었다.

아마도 브릭레인 마켓에서 샀던 것 같은데 그 빈티지 부츠를 참 오랫동안 신고 다녔다. 결코 따뜻하다고 할 수 없었고 조금 딱딱한 부츠였지만 보라색과 검은색이 마치 패치워크처럼 섞여 있었고 앞코가 살짝 뾰족해 좋아했다. 그 부츠는 내 일본 유학에서도 함께 했는데 어찌나 많이 신고 다녔던지 밑창이 터져 더는 신지 못할 때까지 신었고 그렇게 일본에서 내 손을 떠났다. 내 손을 떠났다고 표현한 것은 프리마켓에 참가해 500엔에 팔았기 때문이다. 고쳐서 신으려고 신발 수선집을 이곳저곳 기웃거렸는데 그때는 일본어를 내가 표현하고 싶은 대로는 못하던 때여서 자신감이 없어 용기 내어 들어가지 못하고 그냥 포기했던 것 같다. 그렇게 포기한 부츠라 사실 팔리겠나 하고 아무 생각 없이 내놓았는데 사는 사람이 있어 신기했고 정작 팔릴 때는 아쉬움에 손이 떨렸다. 요즘도 그 부츠가 가끔 생각나고 아쉬운데 아마 지금이라면 자주 가는 신발 수선집에 맡겨 밑창을 갈아 또 열심히 신고 다녔을 것이다.


그리고 또 다른 부츠.

그 부츠는 일본에서 산 레인부츠였는데 무릎 바로 아래까지 오는 긴 부츠였다.

일본은 장마철이 되면 비가 정말 많이 자주 오는데 그 레인부츠 덕분에 몇 년 동안 장마철을 잘 보낼 수 있었고 겨울에만 신던 부츠를 여름에도 당당하게 신고 다닐 수 있어서 그 싫던 여름이 좋아질 정도였다.

그 부츠는 사실 이름 있는 브랜드의 제품은 아니었다.

당시 살던 아사가야의 상점가 신발 가게에서 산 부츠였는데 우리나라로 치자면 시장 신발가게에서 사는 느낌과 비슷하다. 그 부츠는 상점가를 돌아다니다가 우연히 발견했는데 디자인이 정말 마음에 들었지만 유학생에게는 살짝 비싼 감이 있어 세일하기를 기다려 샀던 부츠였다. 비싸 봤자 5000엔, 6000엔 정도였던 것 같긴 한데 그때는 그게 너무 비싸게 느껴져 세일까지 기다렸고 그렇게 해서 산 가격은 3,800엔 정도.

여름이든 겨울이든 비가 올 때마다 정말 열심히 신고 다닌 레인부츠였고 정말 마음에 들었는데 이제는 나에게 없다. 일본에서 한국으로 귀국할 때 짐을 정리하면서 약간, 아니 좀 무거웠던 레인부츠를 짐 무게 때문에 그냥 버리고 온 것이다. 어이없게도. 그때로 돌아간다면 나에게 너 정말 어이없다고, 가방에 꾹꾹 눌러 담으라고 꼭 말해주고 싶을 정도다. 그렇게 좋아하던 부츠를 떠나보내고 나는 아직도 그만한 레인부츠를 발견하지 못했고 요즘도 가끔 아니 자주 그 부츠가 눈에 아른거린다.


여기에 또 다른 부츠.

부츠라고 하기에는 좀 짧고 디자인도 워커 스타일이니 워커라 불러야 더 정확할지 모르겠다.

부츠는 발목 위까지 올라와 끝나는 곳에서 끈을 묶는 디자인인데 부츠 길이와 앞 코가 딱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이었다. 그 부츠는 일본 자라에서 구입한 것이었는데 한국에도 있는 브랜드의 부츠를 왜 환율도 비싼 일본에서 샀느냐 하면 그때는 일본에서 생활할 때이기도 했고 무엇보다 일본과 한국에 들어가는 품목이 달라 한국에서는 그 부츠를 살 수가 없었다. 그 부츠도 일본에서 생활하는 동안 어디에서든 함께 했고 한국에 귀국할 때도 고이 모셔와 그 이후에도 잘 신고 다녔다. 그런데 역시나 시간은 어쩔 수 없는 것. 너무 많이 신고 다녔더니 몇 년 전 밑창이 갈라져 더 이상 신을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전의 부츠처럼 다시는 후회하기 싫어 포기하지 않고 근처 신발 수선집을 다 수소문해 미싱이 있는 신발 수선집을 발견했고 그곳에 맡겨 완전히 새 신발로 재탄생했다. 요즘은 워낙 신발 가격이 싸기도 하고 고쳐서 신기보다는 망가지면 새로 사는 사람이 많아서인지 처음에 부츠를 맡길 때 그곳 사장님이 '새로 사는 게 쌀 텐데.' 하는 반응이었다. 하지만 나중에 다 고쳐진 신발을 찾으러 갔을 때 "가죽이 좋아 오래 신을 거예요."라는 말을 하시며 건네주셨다. 수선 가격이 꽤 나왔지만 좋아하는 신발을 오래 신을 수 있다는 것에 돌아오면서 참 기분이 좋았다. 이 부츠는 지금도 매년 한여름을 제외하고 나와 함께하고 있다.


사실 세 부츠에는 공통점이 있었다.

바로 앞코 디자인이 비슷하다는 것. 레인부츠는 조금 둥근 느낌이지만 나머지 두 부츠는 디자인이 매우 흡사했다. 그런 디자인의 부츠들을 한국에 와서도 열심히 찾아다녔는데 찾을 수 없어 몇 년은 부츠 없이 그냥 보냈던 것 같다. 그러다가 도저히 안 될 것 같아 3-4년 전에 그나마 마음에 드는 롱부츠를 구입해 매년 늦가을부터 초봄까지 잘 신고 다닌다. 하지만 역시나 100% 만족하지는 못해 부츠를 발견하면 매장에 슬쩍 들어가 쓱 둘러보고 나온다. 아마 이 행동은 마음에 드는 부츠를 발견할 때까지 그럴 것이다.




이제 완전히 겨울로 접어들었다.

요즘에는 약간 통이 있는 바지를 입고 다녀 아직 긴 부츠를 개시하지 않았지만(그 대신 첼시 부츠를 신고 다녔다.) 이제 부츠를 열심히 신고 다닐 때가 되었다.

좋아하는 부츠, 좋아하는 니트, 좋아하는 날씨가 다 갖춰진 계절.

올해는 조심조심 보내야 하는 겨울이지만 그래도 겨울을 맞이하게 되어 좋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오늘의 한 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