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즈의 왕' 구하기
이탈리아 사람들에게는 자부심을, 맛있는 요리를 찾는 사람들에게는 즐거움을 주는 식재료입니다. 그 자체도 훌륭한 맛을 가지고 있지만, 파스타를 비롯한 많은 이탈리아 요리가 파르미지아노 레지아노 없이 완성되기 힘들기 때문에 이탈리아에서는 치즈의 왕으로 통하죠.
파르미지아노 레지아노는 유럽 연합의 지리적 표시 보호제도에 의해 인정된, 이탈리아 북부의 몇몇 지방에서만 생산돼요. 생산 과정은 해당 지역의 생산자 조합 등에 의해서 매우 엄격하게 관리되고 있고, 그렇게 생산된 제품만이 파르미지아노 레지아노라는 이름으로 팔리게 됩니다(이에 관해서는 재료에서 더 자세히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그런데 2012년 5월, 치즈의 왕은 큰 위기를 맞습니다.
이탈리아 북부를 강타한 지진이 해당 지역에 막대한 인적, 물적 피해를 입힌 것인데, 그곳에서 생산되는 파르미지아노 레지아노 치즈 공장 역시 예외가 아니었던 것이죠.
어른 몸통만 한 치즈 덩어리 36만여 개가 손상을 입었어요. 경제적 손실은 물론이고 지역민들의 상실감과 좌절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절망적인 상황에서 파르미지아노 레지아노 협회는 모데나의 거장에게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현존하는 가장 위대한 요리사 중 한명인 마시모 보투라였죠. 그의 고향이자 지금도 그가 활동하고 있는 모데나 역시 지진 피해의 한가운데에 있는 파르미지아노 레지아노 생산지였습니다. 마시모 보투라는 지역 경제의 손해를 최소화하고 상처 입은 사람들의 마음을 어루만질 방법을 고민했고 그 결과, 오늘 소개해드릴 리조또 카치오 에 페페가 탄생했습니다.
카치오 에 페페(Cacio e pepe: 치즈와 후추)는 원래 파스타 소스로 유명합니다.
파스타에는 주로 페코리노 로마노 치즈를 사용하는데, 아마 치즈를 녹여 만든다는 공통점에 착안해서 이름을 따온 것 같네요. 어쨌든 리조또 카치오 에 페페에 필요한 재료와 구체적인 조리과정을 한번 알아보시죠.
리조또 카치오 에 페페의 조리과정은 크게 두 과정으로 나뉩니다.
서두에서 말씀드렸다시피, 파르미지아노 레지아노라는 이름은, 이탈리아 북부 특정 지역에서 생산되는 치즈에만 해당하는, 일종의 상표입니다.(지리적 표시 개념을 알고 계시다면 이해가 빠르겠네요) 즉, "파르미지아노 레지아노=파마산 치즈"가 아니라는 말이죠. 파마산 치즈라고 이름붙은 제품들은 미국에서 생산된 제품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특히 왜, 미리 갈아서 가루 형태로 나오는 것들 있잖아요.
물론 그렇다고 꼭 파르미지아노 레지아노를 써야 된다, 이런 말은 아닙니다. 위 내용은 배경 지식정도로만 알아주세요. 왜냐하면, 파르미지아노 레지아노는 비싸거든요.
이 레시피가 그 치즈의 소비를 유도하는 레시피인 만큼, 많은 양이 들어갑니다. 정량으로는 쌀 무게의 1.5배를 사용하는데, 예를 들어 1인분에 쌀 60g을 잡으면 150g을 사용해야 하죠. 흔히 쓰는 치즈 그레이터로 갈다보면 팔이 아픈 양입니다.
게다가 파르미지아노 레지아노는 마트에서 180g에 12,000원씩이나 해요.
저는 백수인 관계로 226g에 8,800 원의 파마산 치즈를, 그마저도 아까워서 레시피 정량보다 50g 적은 100g 사용했습니다(쌀은 60g 사용). 상반기 공채만 뚫으면 비싼 거 사서 많이 쓸게요...
*가루 형태로 유통되는 제품을 사용해도 될지 모르겠습니다. 안 해봐서...
300ml 사용했습니다.
먼저 일반 리조또의 육수에 해당하는 것을 만들어야 합니다. 굳이 이름 붙이자면 파르미지아노 레지아노 육수인데요. 이 과정에는 하룻밤 정도 냉장 보관하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점, 먼저 말씀드립니다.
불에 올리기 전에 치즈와 물을 섞어줍니다. 정량보다 적게 사용했지만 치즈의 양이 상당한 것을 볼 수 있는데요. 신기하게도 물을 부어주니까 물에 녹듯이 치즈가 가라앉았습니다.
약불-중불을 오가며 온도를 올려줍니다. 온도계가 있으신 분들은 80도에서 90도 정도까지 치즈를 가열해주시고 불에서 빼시면 돼요.
온도계가 없을 경우에도 걱정하지 마세요. 치즈물을 가열하다 보면 치즈의 고체 부분이 뭉치면서 마치 모짜렐라 치즈 같은 질감이 형성되는 것을 볼 수 있는데요. 그 지점에서 가열을 멈추시고 냄비를 상온으로 식혀주시면 끝입니다.
불에서 뺀 냄비는 랩을 씌워 냉장실에 하룻밤(8시간 정도) 보관합니다.
하룻밤 지나 꺼내보면, 치즈 육수가 세 가지 층으로 나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층은 얇게 덮인 크림 층인데요. 이 크림 층은 추후에 리조또 마무리용으로 사용되니 숟가락 등으로 살살 걷어서 따로 놓아둡니다.
크림을 걷어내면 그야말로 육수가 있습니다. 가장 바닥에 깔린 고체 부분은 버릴 것이니, 이 물만 체로 걸러 받아놓으면, 리조또 카치오 에 페페를 위한 사전 작업은 끝입니다!
치즈 육수만 제외하면 일반 리조또에 비해 재료가 오히려 간소한 편입니다.
1.5 테이블 스푼 정도 사용했습니다. 버터는 사용하지 않습니다.
통후추 열 알 정도를 칼로 으깼고, 부족한 것은 그라인더로 더 갈아서 썼습니다.
사실 파마산 육수이지만...(시무룩)
보통 리조또 1인분에 들어가는 쌀은 손으로 한 줌 가득 쥔 양으로 봅니다. 저는 한 줌 쥐어보니까 55g이 나오더라고요. 거기에 그냥 5g 더해가지고 60g을 1인분으로 잡았습니다. 그렇게 먹으니까 양이 모자라지는 않았던 것 같네요.
그리고 [리조또 개론(2)]에서 다룬 것처럼 쌀을 한번 헹궈내고 쌀뜨물을 한 번만 받았습니다. 쌀뜨물은 100ml로 계량했고, 준비한 치즈 육수에 더해주었고요.
몇 가지 재료가 대체되거나 빠진 것을 제외하면 조리 과정은 일반 리조또를 만드는 과정과 완전히 동일합니다.
중불에 올리브 오일을 둘렀고, 헹군 쌀을 넣었습니다. 헹군 쌀이라 그런지 들어가자마자 팬 바닥에 엄청 달라붙네요. 어차피 육수가 들어가면 다 뗄 수 있으니까 괜찮긴 하지만 기분은 좀 안 좋습니다. 쌀을 안 씻고 그냥 넣었을 때는 괜찮았던 것 같은데 원래 하던 대로 쌀을 씻질 말아야 되나 싶었어요.
육수를 한국자씩 부어주면서 나무 주걱으로 저어줍니다. 쌀이 붙어있는 것이 있다면 떼주시고... 그냥 뭐... 별거 없네요. 아, 혹시 조리를 하다가 치즈 맛이 너무 강하다, 너무 느끼하다 싶으시면 치즈 육수 대신 물을 넣어가며 조리하셔도 된다고 합니다.
리조또는 대개 조리시간이 15분에서 20분 사이입니다. 개인적으로는 다 됐나...? 싶을 때 쌀 한두 톨 정도를 직접 먹어보고 판단하는 편이에요.
치즈 육수를 만들 때 걷어냈던 크림을 섞어줍니다. 시간이 지나면 약간 굳어있기는 하겠지만 리조또가 아직 뜨거운 상태일 테니 넣으면 잘 섞일 거예요.
거칠게 빻은 후추를 뿌려주시고 필요하다면 그라인더로 더 갈아주셔도 좋습니다.
개인적으로는 파르미지아노 레지아노가 주인공인 요리라는 점이 재밌었습니다. 파르미지아노 레지아노 치즈는 그저 '파스타 위에 가는 거'가 아니었던 거죠. 치즈의 맛이 참 매력적이었고 느끼하다는 생각도 안 들었습니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파르미지아노 레지아노만 잘라서 먹기도 하던데, 그 맛도 궁금해졌어요.
하지만 그래서 더 아쉬움이 남더라고요. 재료 부분에서 변명을 늘어놓은 것처럼, 최고가 아닌 재료를 정량보다 적게 사용했으니 '이걸 제대로 만들었으면 얼마나 맛있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뭐... 그거야 다음에 그렇게 만들면 되니까요. 취직하면 1인분에 12,000원짜리 집밥을 매일같이 먹을 수 있겠죠?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네요!
오랜만에 요리를 하고, 레시피 글을 올리네요. 그러고 보니 2017년 첫 레시피 글입니다 ㅋㅋㅋ
음... 나름 스토리가 있다 보니, 오늘 요리는 생각할 점이 많았어요. 그 중 하나만 얘기하자면, 누구든 자신만의 확고한 삶의 태도를 가진 사람은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 매력적이라는 것입니다. 마시모 보투라에게 만약 요리와 지역 문화에 대한 사랑과 존중이 없었다면, 그런 상황에서 리조또 카치오 에 페페같은 요리를 고안할 수 있었을까요?
요리에 국한해서 생각할 일은 아니겠습니다. 과연 저에게는 그러한 철학이나 행동 원리가 있는지, 있다면 그것이 무엇인지 궁금해지네요. 책도 많이 읽고, 공부도 많이 하고, 생각도 많이 하면서 살아가야겠다... 는 다짐으로 글을 마무리 짓겠습니다.
감사합니다~
1. 셰프의 테이블 시즌1 에피소드1
2. 리조또 카치오 에 페페 레시피(1) "https://foodcookture.com/2012/10/27/in-honor-of-parmigiano-reggiano-night-risotto-cacio-e-pepe/"
3. 리조또 카치오 에 페페 레시피(2) "http://www.saveur.com/article/recipes/risotto-cacio-e-pepe"
4. 리조또 카치오 에 페페 동영상 레시피 "https://www.youtube.com/watch?v=Cjoipd3aWhQ"
6. 사진2 "http://www.econovill.com/news/articleView.html?idxno=247317"
7. 사진3 "http://www.ssg.com/item/itemView.ssg?itemId=1000013125506&siteNo=6001&salestrNo=20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