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육점에 가야 하는 이유
어딘가 께름칙하시죠? 사실, 그렇게 나쁜 녀석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돼지비계에서 맛 좋은 기름을 뽑아낼 수 있기 때문인데요. 이렇게 만든 기름을 라드(lard)라고 합니다.
버터가 일반적으로 사용되기 이전에는 라드를 많이 썼다고 해요. 지금도 일부 조리법을 보면 표기해놓은 경우가 종종 있기도 하고, 특히 동유럽 쪽에 가면 라드를 사용한 요리가 많이 남아 있다네요. 심지어는 빵에 발라먹는 것도 있다니...
하지만 동물성 지방, 그리고 돼지비계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널리 퍼진 뒤에는 라드 사용이 급격하게 감소했습니다. 사실 동물성 지방이 무조건 몸에 안 좋다고 말하기도 힘들고, 정작 대신 사용되는 버터에 비하면 라드가 훨씬 건강한 기름이기 때문에 굳이 라드를 기피할 이유가 없는데도 말이죠. 그래서인지 오히려 최근에는 영양적으로 장점이 많고, 발연점이 높아 활용도도 좋으면서, 풍미가 뛰어나다는 점을 이유로 라드가 재조명되는 추세입니다.
그러니까 만들어 봅시다!
필요한 재료는 다음과 같습니다.
돼지비계는 집 근처 정육점에서 얻었습니다. 그냥 얻기가 좀 뭐해가지고 삼겹살 600g을 구입하면서 '혹시 돼지비계 작업한 거 있으시면 좀 같이 살 수 있을까요...?'하고 물어봤어요. 보통 이렇게 물어보면 '어디 쓰려고 그러냐'고 되묻곤 하시는데, '기름 내려고 한다'라고 대답하시면 됩니다. 근데, 아마 그 정육점에서 돼지고기 작업하는 날을 맞춰서 가셔야 할 거예요. 비계는 손질한 뒤에 그냥 폐기하시는 걸로 알고 있어서요. 저는 마침 때가 맞았던 것 같습니다. 마음씨 좋은 아저씨께서 돼지비계 700g 정도를 그냥 가져가라면서 주셨어요!
원래 식용 라드는 돼지 신장 주변의 지방으로 만드는 것을 최상품으로 친다는데, 제가 받은 것은 그건 아니었던 것 같네요. 처음 가서 비계 얻는 마당에 그런 것 까지 따질 수는 없는 것이고... 단골로 계속 방문해서 좀 친숙해지면 한번 여쭤봐야겠네요 ㅋㅋ...
이후에 보시면 아시겠지만, 본격적인 렌더링(redering) 과정에서 사용할 것입니다.
저는 유리병을 사용했습니다.
조리과정을 알아봅시다.
받아온 비계를 최대한 잘게 썰어야 기름 뽑는 시간도 단축되고, 냄새 없이 잘 나온다고 합니다. 본격적인 작업 전에 비계를 냉장고에 좀 넣어두시면 살짝 굳어서 작업이 약간 수월해지실 겁니다. 그래도 생각했던 것보다 지저분하거나 기분 나쁘진 않았네요. 할만해요!
가는 줄 모양으로 썰어서 한 번에 썰어주었습니다. 어디서 보기로는 정육점에서 가져올 때부터 '갈아달라'고 하면 된다는데... 저는 차마 그렇게까지 요구하지는 못했습니다. 이것 역시 단골 고객이 되면 나중에 넌지시 한번 여쭤보는 걸로...
물 반 컵이나 한 컵 정도를 냄비에 붓고, 중불 정도로 불을 올려주세요. 물을 붓는 것은 기름이 나오기 전, 비계가 타거나 들러 붓지 않게 하기 위함입니다.
손질한 라드를 모두 넣습니다. 5분 정도 시간이 지난 뒤에는 약불로 줄여줬어요. 이제는 정말 기다림의 시간입니다.
약불로 둬도 계속 열을 받다 보면 부글부글하고 끓는 게 보입니다. 골고루 열을 받도록 중간중간 나무 주걱으로 저어주세요. 약한 불로 오랜 시간 뽑아낼수록 질 좋은 라드가 나온다고 하는데요, 저는 솔직히 적절한 온도가 어느 정도인지를 몰라서 그냥 약불에 두고 기다렸어요.
적당히 기름이 빠졌다 싶으면 알맞은 용기에 깔때기와 거름망을 대고 기름을 옮겨주시면 되겠습니다. 기름 나오는 양이 꽤 되다 보니, 기름을 여러 차례 옮기기도 하는데요, 이럴 때는 아무래도 먼저 나온 기름의 질이 좋다고 해요. 그래서 옮겨 낸 순서에 따라 따로 보관하기는 경우도 있습니다만, 저는 용기에 자리도 많이 남고 해서... 그냥 하나에 다 담았습니다.
그리고 노파심에서 말씀드리자면, 깔때기는 스테인리스로 만들어진 것을 사용해주세요. 기름이 생각보다 뜨겁다 보니 플라스틱은 녹을 수도...
*4월 3일 오전 추가분(간단하게 생각하고 작성해서 그런지 이번 글은 유난히 빼먹고 넘어간 부분이 많네요 ;;)
비슷한 차원에서, 라드를 용기에 담으실 때도 주의해주세요. 약불로 놔둔 것이지만 상당히 뜨겁거든요. 내열 용기라도 터지거나(!?) 유리가 아니면 아예 녹아버리는(!?) 경우가 있을 수도... 말은 겁나지만 해결책은 간단합니다. 기름을 용기로 옮기기 전에는 꼭 적당히 식혀주시길!
완전히 기름이 다 뽑히면 갈색 비계 조각 같은 것들이 자잘하게 남아요. 왜, 삼겹살 갈색으로 빠싹 구웠을 때 나오는 그런 거요. 처음 가져온 비계의 양을 생각해보면 놀랄 만큼 작은 조각들이 남는데, 거기 소금, 후추 간해서 먹으면 맥주 안주나 간식으로도 괜찮답니다. 실제로 그렇게 돼지비계를 요리해서 먹는 음식도 있다고 하니... 괴식은 아니에요. 저는 먹어봤는데 느끼해서 금방 물렸습니다.
저는 총 2~3시간 정도 열을 가했습니다. 불이 좀 센 것이었는지... 생각한 것보다는 시간이 덜 걸렸네요.
라드는 상온에서 고체로 존재합니다. 뜨거웠던 기름을 식히시거나, 냉장고에 넣어놓으시면 이렇게 굳은 것을 보실 수 있을 거예요. 근데 놀랐던 것은, 버터처럼 딱딱하질 않더라고요. 숟가락으로 부드럽게 퍼지는 정도입니다. 그래서 사용하기 굉장히 간편했어요.
색깔은 하얗게 잘 나온 듯하네요. 보는 각도에 따라서 살~짝 노란빛이 도는 것은 같은데, 어차피 최상급의 완벽한 라드를 원한 것은 아니니 저 정도면 괜찮을 것 같아요. 냄새가 있긴 있는데, 흔히 실패한 라드를 가리킬 때 말하는 '돼지 비린내' 이런 것은 아닌 것 같단 말이죠... 딱히 거슬리지는 않고, 뭔가 베이컨이나 삼겹살을 구웠을 때 나는 구수한 냄새...? 모르겠네요, 그게 그건가? 근데 직접 조리할 때 사용해도 냄새나서 이상하다 이렇지는 않아서요.
*3월 31일 오전 추가분
렌더링한 라드는 냉장고에서 기본 3개월, 꼭꼭 잘 밀봉해 보관할 경우 6개월까지가 보관기간이라고 합니다. 돼지 비계는 금방 상한다던데, 재밌네요. 저는 3개월 정도 생각하고 쓰려고 합니다. 그동안 정육점 가서 물건 많이 사야죠...
직접 사용해보니, 생각만큼 드라마틱한 효과는 없었어요. 뭐, 여기저기서 '계란 후라이 하나도 어마어마하게 맛있어진다'는 식의 말을 듣다보니, 너무 기대가 컸나보네요. 그래도 저렇게 공들여서 만들었는데, 기분상으로라도 더 맛있게 느껴지는 것은 사실입니다ㅋㅋ...
라드는 꽤 오래전부터 만들어보고 싶었던 재료예요. 좋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고, 뭔가 비장의 무기 이런 느낌이라서 '꼭 써봐야지!' 이러고 있었거든요. 하지만 돼지비계를 어디서 어떻게 구해야 할지도 막막했고, 비계, 그러니까 기름 덩어리를 만져야 한다는 것이 부담스러워서 망설였죠. 그래도 이번에 용기를 내서 정육점도 찾아가고, 직접 라드도 뽑아보고 하니까 뭔가 기분이 되게 뿌듯합니다!
좋은 재료로 만들어야 좋은 음식이 나온다는 것이 저의 지론이거든요. 제가 뭐, 완벽하게 잘 하지는 못하지만 이렇게 정성을 들여서 만들어내는 재료가 나름 또 좋은 재료 아닐까... 하고 생각해봅니다. 더 공부하고 노력해서 진짜 좋은 음식만 만들고 싶네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