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위에 남은 것
간 밤에 눈이 내렸다. 동구릉에 산책을 나갔다. 양 볼이 얼얼하도록 춥긴 했지만 쨍한 겨울의 냄새가 상쾌했다. 햇빛이 잘 들어오는 능에는 눈이 모두 녹았다. 마지막 코스는 늘 숭릉의 연지 앞이다. 아무도 걷지 않은 연못가는 고즈넉했다. 갈색의 둥근 연자가 고개 숙인 채 물에 잠겨 얼었고 그 위를 하얀 눈이 덮어주고 있었다.
연못 한쪽은 아직 얼지 않은 곳이 남아 있어 발길을 옮겼다. 가장자리에 숫눈을 밟은 새의 발자국이 눈에 띄었다. 가까이에서 보니 발자국은 일정하지 않았다. 발자국의 크기로 보아 작은 새는 아니고 키가 큰 새 같았다. 두 다리로 걸었을 텐데 자국은 X처럼 겹치거나 한 발로 원을 그린 것처럼 둥근 모양이었다. 어디에서 왔는지는 모르지만 물 속의 먹이를 찾았던 흔적으로 보였다.
나는 잠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혹시 새가 다시 나타나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하지만 바람만 지나갈 뿐이었다. 기다림이 길어질수록 새는 이미 이곳을 떠났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발끝부터 감각이 둔해졌다. 장갑 속 손도 점점 차가워졌다. 오래 서 있을 자리는 아니었다. 몹시 추운 날이었고 그 새는 혼자 였을 것이라 생각했다.
나는 그 발자국을 보며 내가 걸어온 길을 떠올렸다. 걸어온 길과 지금 가고 있는 길, 그리고 아직 가야 할 길이 서로를 덮으며 남아 있었다. 분명하게 선택했다고 말하기 어려운 시간들이었다. 다만 그렇게 지나왔고, 그렇게 남아 있었다.
눈은 이 흔적을 오래 기억하지 않을 것이다. 해가 조금 기울자 발자국의 가장자리는 느슨해졌다. 오래 남아 있을 흔적은 아니었다. 그래도 그 새는 이 추운 날을 혼자서 건너갔을 것이다. 나 역시 그런 날들을 지나 여기까지 와 있다.
나는 숫눈을 밟으며 다시 걷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