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천히 달릴 때 비로소 보이는 것들
때때로 삶이 달리기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어디로 향하는 지도 모른 채 남들이 가는 길을 따라 달리다 보면 내가 왜 이 길 위에 서 있는지조차 흐릿해 진다. 아들의 뒷모습을 쫓아 시작한 달리기는 나 자신의 숨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시간임을 느낀다. 삶이 가끔 숨차게 느껴질 때면 나는 가만히 운동화 끈을 조여 맨다. 그저 내 발바닥에 닿는 지면의 단단한 감촉과 귓가를 스치는 바람소리에 집중하여 한 걸음씩 내디딜 뿐이다.
천천히 달릴 때 비로소 곁에 둔 풍경들이 눈에 들어 오듯, 내 속도를 찾을 때 삶은 나만의 박자로 흐르기 시작한다. 그렇게 숨을 고르고 나면, 다시 한 걸음을 내디딜 힘은 기분 좋은 땀방울과 함께 이미 내 안에 차오르고 있다.
어느 날부터 아들은 달리기를 시작했다. 비쩍 말랐던 몸은 직장인이 되고 몇 년 되지않아 살이 찌고 배가 나왔다. 잦은 회식에 스트레스 쌓이면 한 잔 두 잔 하는 술 때문이었다. 입사하자마자 독립했기에 옆에서 잔소리할 사람도 없으니 규칙적인 식사와 운동을 하기란 어림 없었음을 안다.
아들은 건강의 적신호가 심각하다고 느껴 제대로 관리를 해야겠다고 결심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자신이 좋아하는 운동을 생각해 보았고 학창 시절 달리기를 잘했던 기억이 났다. 배울 필요도 없는 가장 쉬운 운동이지만 꾸준히 하려는 의지력이 필수였다.
그는 무덥고 길었던 여름 내내 달리기를 멈추지 않았다. 가만히 있어도 숨막히게 더웠기에 달리다 오히려 쓰러질 것 같은 걱정이 들었지만 괜찮다고 했다. 밤이 되면 한낮의 열기가 조금 식어서 달릴 만하다는 것이었다. 마라톤 대회에 치열한 접수 경쟁을 뚫고 풀코스에 참가하게 된 만큼 완주하고 싶다고 열심히 연습했다. 퇴근해서도 일에 대한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했는데 회사에서 일하다가 달릴 생각을 하면 기분이 좋아진다고 하니 일석이조의 효과였다. 집에 들를 때마다 살이 빠지고 점점 탄탄하게 변신한 외모와 함께 활기 있어진 모습이 보기 좋았다. 폐활량 개선과 달리기의 효율을 높이기 위해 담배까지 끊었다는 소식이 제일 반가웠다.
그는 첫 출전한 춘천 마라톤 대회에서 3시간 35분 1초로 풀코스를 완주했다. 그에게 끈기가 부족하다고 생각했었는데 여름내 노력한 모습을 지켜보며 대견한 마음이 들었다. 내게도 러닝화를 사주면서‘슬로우 조깅’을 권했다. 나는 해보지도 않고 무릎이 좋지 않아서 못하겠다고 했다. 어느 날 공원을 걷다가 조금씩 달려보았다. 걷는 것보다 색다른 산뜻함이 기분을 업 시켰다. 무엇보다 무릎이 아프지 않았다.
천천히 달리며 스쳐 지나가는 풍경이 생경하게 다가왔다.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며 걷는 사람들, 강아지와 산책하는 사람, 푸른 나무들과 꽃밭의 풍경이 더 경쾌한 리듬으로 지나가는 것이었다. 빠르게 걸어도 땀이 나지 않았는데 달리니까 흠뻑 땀이 났다.
40분 뛰었어, 오르막도 힘들지 않고 숨도 차지 않아. 그에게 문자를 보냈다. 역시 같은 유전자 인가봐. 엄마가 체력이 좋네. 그는 호흡법도 알려주고 격려를 해주었다.
남산 둘레 길을 산책하다가 사람들이 함께 모여 뛰는 모습을 보았다. 여러 동호회 사람들끼리 무리 지어 뛰었다. 혼자 뛸 수도 있지만 함께 모여 도심을 달리는 ‘러닝 크루’의 유행이 시사하는 바가 크다. 개인화된 세상에 익숙한 이들이 왜 굳이 함께 숨 가쁘게 달리는 것인지 생각해 보았다. 곁에서 들리는 거친 숨소리와 보폭을 맞추는 연결이 사람들의 불안을 잠재우고 진정한 안도감을 주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느낀다면 불안은 사라지고 충만함이 차차 마음을 든든하게 채우게 되는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