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백 필름 속의 몽고메리 클리프트는 언제나 우수(憂愁) 어린 눈빛이 전매특허였다. 내면의 상처를 간직하고 있는 듯 한 그의 외모는 모성애를 자극했고 지금도 록 허드슨, 제임스 딘 등과 함께 미남 배우의 계보를 벗어나지 않는다. 젊은 시절 그의 영화를 본 것은 ‘지상에서 영원’으로 와 ‘젊은이의 양지’가 전부였지만 영화 마니아들에게는 손꼽히는 명작으로 기억된다. 특히 ‘젊은이의 양지’에서 엘리자베스 테일러와 몽고메리 클리프트의 키스신은 가장 아름다운 키스신중 하나다 조지 스티븐스 감독은 막 피어나는 6월의 장미처럼 아름다운 엘리자베스 테일러의 얼굴을 클로즈업시키는데 두 남녀 주연배우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것처럼 보였기에 호사가들은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한 말들이 많았다. 아니나 다를까? 엘리자베스 테일러도 몽고메리 클리프트에 대해 상당한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몽고메리 클리프트는 엘리자베스 테일러를 비롯한 많은 여배우들의 눈빛을 거절한 점잖은 신사였다고 하는데 그 이유가 놀랍다.
동성애자였기 때문이다. 그의 슬픈 눈빛이 자신의 감추어진 성정체성으로 인한 것이란 생각이 든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동성애자에 대해 편견을 가지고 있는데 그가 활발히 활동했던 50년대에 동성애란 꽁꽁 숨겨 두어야 할 금기의 사랑이었다.
또 하나 엘리자베스 테일러와 출연한 "애정이 꽃피는 나무"에 출연하던 몽고메리 클리프트는 촬영 시작 3개월 만에 심한 교통사고를 당하고 만다. 절망한 그는 수차례의 성형수술을 통해 자신의 본래 모습을 찾으려고 했지만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 후 약물중독과 술로 인해 삶은 추락하기 시작했고 66년 심장마비로 세상을 뜨게 되는데 그의 나이 46살이었다. 30살 시절에 이 영화를 본 후 그만큼의 세월이 흐른 후 다시 보게 된 ‘젊은이의 양지’는 영화 자체가 가지고 있는 매력도 크지만 이제는 고인이 된 몽고메리 클리프트와 엘리자베스 테일러를 추억하며 자신의 지난 세월도 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기에 기억에 남는 영화다.
흐르는 강물처럼 시간도 막힘없이 흘러갔고 이제 화면 속에서만 만날 수 있는 배우들의 이름을 예쁘게 써보는 것은 그때의 시간들이 준 아름다움의 가치를 비로소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젊음이 가지고 있는 아름다운 외모는 인간의 역사가 기록된 이후로 자신의 신분을 상승시킬 수 있는 가장 커다란 힘이고 무기였다. 트로이 전쟁은 헬렌이라는 아름다운 여인을 얻기 위한 수컷들의 경쟁으로 시작되었고 지금도 소설이나 영화의 가장 흔한 소재로 다루어지고 있다. ‘젊은이의 양지’를 보면서 너무 쉽게 떠오르는 영화가 ‘태양은 가득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윗몸을 드러내며 일광욕을 즐기던 톰은 완전 범죄를 자축하며 축배를 드는데 새로 시작된 사랑 때문에 옛 애인을 살해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던 조지(몽고메리 클리프트)와 닮았다. 여인의 시선을 한 몸에 받을 수 있는 잘 생긴 외모와는 반대로 낮은 신분으로 인간 열등감은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동전의 양면이다.
“찌질하게 살다가 죽을 것인가? 아니면 뛰어난 외모를 무기로 신분 상승을 통해 멋지고 안락한 삶을 살 것인가?”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을 이 두 마음에서 자신도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에 이런 주제의 영화는 주인공에 대한 분노보다 연민이 앞선다. 이유는 나 자신에게도 그들과 똑같은 욕망이 숨겨져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조지 이스트만(몽고메리 클리프트)는 하나님 밖에 모르기에 전도하는 것을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명으로 알고 있는 어머니를 떠나 인간의 욕망을 극대화시키는 도시로 떠난다. 그곳에는 조지가 의지할 수 있는 부자 숙부가 있었다. 조지는 너무나 쉽게 공장 여직원 엘리스와 사랑에 빠진다. 다음에 영화가 어떻게 전개되는지 빤히 알 수 있는 스토리지만 영화가 감동인 것은 숙부의 딸 안젤라 비커스(엘리자베스 테일러)와 신분을 뛰어넘는 진실한 사랑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임신까지 한 여자를 버리면서 무슨 사랑이야?”
라고 질책할 수 있겠지만
“자신에게 이런 사랑이 찾아온다면 누군들 거부할 수 있을 것인가?”
란 질문도 던질 수 있기 때문이다. 조지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다는 것을 알고 있는 안젤라는 그를 구하기 위해 가문의 명예가 실추되는 것을 알면서도 최선을 다하고 조지는 무디어진 자신의 양심을 자책하며 기꺼이 사형을 감수하는 결말은 우리 시대의 가치관으로 봤을 때는 어리석어 보일지도 모른다. 병적인 이 세상의 모습과 너무 다른 두 사람의 사랑은 그래서 역설적인 감동이 있다. 왜냐하면 진실한 사랑은 인간이 추구해야 할 가장 소중한 가치이기 때문이다.
사형 직전 어머니와 목사가 면회를 온다. 어머니는 독실한 신앙인답게 아들을 위로한다.
“죽음은 사소한 것이다. 다만 신에게 용서를 빌어라.”
이때 목사는 검사처럼 조지를 추궁한다.
“너 자신과 하나님만이 아는 진실이 있다. 아니 이 경우에는 하나님만이 아는 것일지도 모르겠구나. 둘이 강물에 빠졌을 때, 왜? 그녀를 구하지 않았어?, 그때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지? 눈앞의 여자를 생각했었나? 아니면 다른 여자를 생각하고 있었는가?”
조지가 대답하지 못할 때 목사는 말한다.
“그렇다면 너는 살인자야.”
사랑이 죽음보다 깊은 이유는 선악의 모든 기능이 마비된 채 모든 것을 버리고 사랑을 선택하기 때문이다. 누구에게는 감동이고 누구에게는 죄악이 되는 이유다. 인간의 이성을 마비시킬 정도로 두 사람의 사랑은 관객들에게 끌림으로 다가오는데 몽고메리 클리프트의 우수에 젖은 눈과 21살로 눈부시게 아름다운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화면을 채우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사랑은 발코니에서의 키스신으로 눈부시게 빛나는데 진정한 사랑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