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에 앉아 순서를 기다리는 그의 표정은 마치 주사 한 대 맞고 처방전을 받아가는 감기환자처럼 여유롭고 평안하다. 정원의 나지막한 목소리로 내레이션이 시작된다.
‘내가 어렸을 때 아이들이 모두 가버린 텅 빈 운동장을 좋아했었다. 그곳에서 돌아가신 어머니를 생각하고 아버지도 나도 언젠가는 사라져 버린다는 생각을 했었다.’
어머니의 죽음을 일찍 본 때문일까?
정원에게 죽음은 친근감으로 다가온다. 언제인지 모르지만 자신도 어머니처럼 홀연히 사라진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인생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알지만 내색하지 않는다. 죽음을 담담히 받아들일 수 있기에 정원의 일상은 아버지가 물려준 초원 사진관에서 사진을 찍고 현상하며 편안한 하루를 보내고 있다.
모든 감성 로맨스 영화가 그렇듯이 이때 홀연히 다림(심은하)이 나타난다. 주차단속 일을 하고 있는 그녀는 단속에 걸린 차주들과의 마찰과 과도한 업무로 인해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 어느 날 장례식에 다녀와 피곤한 정원에게 주차위반 사진을 뽑기 위해 다림이 온다.
“조금만 있다 오시면 안 될까요?”
라며 정원은 부탁하지만 다림은 “안 된다”며 일방적으로 사진을 맡긴다. 하루 세끼 밥을 먹듯이 꼬박꼬박 약을 먹는 정원의 모습을 보며 관객들은 그가 아프다는 생각만 할 뿐이다 감독은 정원이 어떤 병에 걸렸는지, 어떤 치료를 받고 있는지. 그의 삶이 얼마나 남았는지를 말해주지 않는다. 그러기에 관객은 언제 홀연히 정원이 사라질지 모른다는 안타까움을 가지고 있다. 밖에서 사진이 완성되기를 기다리며 서성이는 다림을 본 정원은 슈퍼에서 산 아이스케이크를 건네주며 자신이 짜증 낸 것을 사과한다. 다림은 새침하고 정원은 부드럽다.
이제 두 사람의 사랑이 시작된다는 것을 안다. 문제는
“이 사랑이 비극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는데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
라는 궁금증이다.
사진을 현상하는 극히 사무적인 일 때문에 두 사람은 사진관이라는 공간 속에서 자연스럽게 만나며 서로를 알아간다. 주차단속이라는 밥벌이의 지겨움에 지쳐있는 다림에게 “힘들죠?” 라며 정원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나지막한 톤으로 묻는다. 배우 한석규의 매력이다. 다림을 위해 선풍기를 틀어주자 지친 그녀는 잠깐 눈을 붙인다.
아버지와 여동생과 가족사진을 찍고, 친구들과도 마지막이 될 기념사진을 찍으며 정원은 자신의 죽음을 준비하지만 다림과의 만남은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둘 다 아픔을 가지고 있지만 “다림이 정원에게 어깨를 빌려주지 않을까?” 란 기대감이 드는 것은 순백으로 빛나는 두 사람의 마음에 공감하기 때문이다. 오토바이에 탄 다림 때문에 환한 웃음을 짓는 정원과, 새침하면서도 수줍은 듯한 다림의 미소는 사랑의 시작을 알리는 멋진 장면이다. 입술에 립스틱을 바르는 다림의 표정에 행복이 묻어있다. 정원에게 예쁜 여자로 보이고 싶다. 비 많이 오는 날 작은 우산을 함께 쓰고 사진관으로 향하는 두 사람의 모습은 사랑이 진행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또 하나 기억에 남을 장면이다.
고급 레스토랑에서 와인 한잔을 먹어본 적도 없고, 고작해야 사진관에서 캔 맥주 한잔 하고, 서울공원에서 청룡열차 탄 것이 전부였지만 두 사람의 사랑은 이제 팔짱을 끼고 다닐 정도로 발전한다. 영화는 잔잔하다 못해 고요하다. 그러나 화면은 조금씩 한석규에게 다가오는 죽음의 그림자를 보여준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나는 긴 시간이 필요한 사랑을 하고 있다. “
정원의 간절한 바람에도 불구하고 운명은 두 사람에게 긴 시간을 주지 않는다. 갑자기 찾아온 죽음의 그림자 앞에 정원은 속수무책이고 그 사실을 모르는 다림은 하염없이 문이 잠긴 사진관 앞에서 배회한다. 기다림 그리고 또 기다림의 연속이다. 다림은 편지를 써서 사진관의 문틈에 집어넣기도 하고, 술에 취한 어느 날은 돌멩이를 들어 사진관의 유리를 박살 낸다. 그가 궁금하다. 아니 보고 싶다. 비록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없고, 그 흔한 입맞춤 한 번 없지만 다림의 행위가 아리게 다가오는 것은 돌팔매질로 그 사랑의 깊이를 느끼기 때문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다림은 자신의 사진이 사진관속에서 환하게 웃는 모습을 발견하고 웃는다. 정원이 찍어준 것이다. 심은하는 예쁘고 청순하다. 이때 다시 한석규의 그 부드러운 목소리가 내레이션으로 들린다.
‘내 기억 속의 무수한 사진들처럼 사랑도 언젠간 추억으로 그친다는 것을 난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당신만은 추억이 되질 않았습니다. 사랑을 간직한 채 떠날 수 있게 해 준 당신께 고맙다는 말을 남깁니다.‘
그래, 모든 사랑의 종착역은 추억이다.
가끔 한 잔 술에 취해 한 사람을 생각하는 것도 추억으로 남아있는 사랑에 대한 아련함이다. 그러나 진정한 사랑의 가치는 추억이 아니라 가슴에 간직된 것이다.
둘 사이에 있었던 아름다운 몇 장면은 사랑이란 이름으로 간직하고 싶은 것,
“당신께 고맙다는 말 남깁니다.”
이 한마디가 떠나보낸 사랑에 대한 예의가 아닐까?
사랑하다가 한쪽이 죽는 감성 로맨스 영화의 감동은 사랑의 절절함에 있다.
영화 ‘러브 스토리’도 ‘타이타닉’의 감동도 그들의 사랑을 방해하는 비극이 크면 클수록 사랑도 비례하기에 관객들은 눈물을 훔치며 그 사랑에 감동하며 안타까워한다. 그러나 ‘8월의 크리스마스’는 겉으로 드러난 사랑의 모습은 극히 일상적이다.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장소이고 평범한 인물이다. 극적인 사랑의 표현도 없지만 이 영화가 주는 울림은 한 동안 지속된다. 왜냐하면 영화 속의 장면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원래 과작인 허준호 감독의 데뷔 작품이라니 놀랍다. 그는 극히 절제된 감정을 통해 순수하고 깨끗한 사랑을 표현하는 데 성공했다. 요즘처럼 겉으로 드러난 사랑표현에 익숙한 세대는 공감이 적을지 모르겠지만 촉촉이 내리는 비에 어깨가 젖는 것처럼 사랑은 마음을 적시는 것이라고 믿는 감성을 지녔다면 이 영화는 오랜 여운이 남고 꼭 소장하고 싶은 충동이 인다. 이번 영화도 역시 조성우 음악감독의 힘이 컸다. 사람을 한없이 외롭게 하는 것. 음악의 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