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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세일 Jun 15. 2023

사랑은 행복의 나라로 함께 가는 것

영화 '행복' 리뷰 

‘어느 나라 어느 사회나 어디엔가 높은 정신이 살아 있어야 그 사회가 살아 있는 것과 다름없는 이치라고 생각한다.’

                                - 박완서 수필집 ‘세상의 예쁜 것’ 중에서 -

영화 ‘행복’을 보고 난 후 박완서의 이 글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높은 정신’이 있어야 사회가 사는 것처럼 사랑도 높은 정신이 있을 때 그 아름다움에 감동한다.

비열하고 추악한 인간성을 연기하는 배우 중에 황정민을 따를 연기자가 있을까?
그가 소중한 배우로 기억되는 것은 어둠 속에 살짝 남아있는 인간의 선함을 잘 표현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그가 아무리 악한 역을 맡는다고 할지라도 영화관을 나오는 순간 그에게 연민의 정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이 황정민이라는 배우가 가지고 있는 매력이다.

자신이 가지고 있던 클럽을 더는 운영할 수 없기에 친구에게 양도한 영수(황정민)는 간경변증으로 인해 언제 죽을지 모르는 위기에 놓여있다. 설상가상으로 동거하던 수연(공효진)에게 버림받는다.

“결혼은 하지 마라 복잡한 것 싫으니까?”



자신이 가장 힘들 때 영수는 쪽 팔린다는 이유로 수연에게 “유학 갔다 오겠다”라고 거짓말한다. 유학이 아니라 건강관리를 위해 한적한 시골에 있는 요양원으로 떠나는 것이다. 그러면서 수연에게 “결혼은 하지 말라”라고 한다. 이 말은 수연하고의 육체적 쾌락은 즐기되 책임을 지지 않으려는 영수의 속마음을 솔직히 보여준다. 수연은 한술 더 떠서 “자기야 우리 끝난 거야”라며 직격탄을 날린다. 모든 것을 잃어버린 영수는 이제 수연에게 걸림돌이 될 뿐이다. 육체적 쾌락을 중심으로 한 두 사람의 관계는 이렇게 쉽게 이별을 고한다. 사랑하는 사람이 가장 힘들고 어려울 때 옆에 있는 것이 사랑의 힘이다. 그러나 영수에게는 아프다고 말하는 것이 쪽팔리는 일이고, 모든 것을 잃고 죽어가는 사람에게 “우리 끝난 거야”라는 말을 가볍게 할 수 있는 영수와 수연의 관계를 사랑이란 이름으로 부를 수 있을까?

책임지거나 구속함이 없는 육체적 관계를 우리 시대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하기 시작했다. 사랑이 끝나 냉정한 모습으로 돌아설 때 우리는 쿨하다고 한다. 질질 짜고 미련 때문에 울고 그리움에 목말라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책임질 필요가 없고 본능에 충실한 사랑이 우리 시대의 가치관이 된 것은 그리 오랜 일은 아니다. 환승 연애라는 뜻을 몰랐기에 “뭐예요?”라고 물었더니 요즘 젊은이들은 지하철 갈아타는 것처럼 쉽게 교제의 대상을 바꾸는 것이라 한다. 



영수는 모든 것을 포기한 채 아무도 모르게 요양원에 들어가고 거기서 자신의 몸을 휴양하면서 봉사하는 은희(임수정)를 만난다. 그녀는 40%의 폐만으로 이곳에서 8년을 살고 있다. 그렇지만 누구보다 자신의 삶에 긍정적이고 얼굴에 미소가 떠나지 않는다. 그런 그녀가 영수에게 다가간다. 영화관에서 손을 잡지 않은 영수에 대한 야속한 마음에 “영화관에서 남들은 손을 잡고 그러잖아요?”라며 손잡아 주기를 바라기도 하고 “저 옮는 병 아니에요?”라며 적극적으로 키스를 요구하기도 한다. 이런 사랑의 배경에 허진호 감독의 영화는 언제나 비가 내린다. 그에게 비는 사랑의 시작이고 아픔이다. 두 사람의 사랑도 비와 함께 시작된다. 은희는 영수를 위해 살고 싶다. 그녀의 사랑이 안타까운 이유는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오직 영수를 돌보는 헌신적 사랑 때문이다. 드디어 그들은 요양원을 나와서 둘만의 보금자리를 만든다. 이때 화면은 사랑으로 가득 차 있다. 허진호 감독의 영상미가 잘 나타나 있는 가을 시골 풍경은 두 사람의 사랑만큼이나 아름답고, 은희가 보여준 사랑의 힘은 영수의 건강을 거의 회복시켜 놓는다.



서두에 비열하고 추악한 인간성을 표현하는데 황정민만큼 뛰어난 배우는 없다고 했는데 이때 그의 연기가 빛을 발한다. 건강이 회복된 그는 서서히 시골 생활에 염증을 느낀다. 이때 불난 데 부채질하는 격으로 영수의 사업을 인수했던 친구와 수연이 찾아온다. 영화는 이제 갈등으로 접어든다. 친구는 영수에게 클럽 하나를 경영해 달라는 부탁을 하고 수연은 영수가 쓰던 핸드폰을 건네주며 “내가 답답하니 연락하라?”라고 한다. 영수의 마음이 서서히 은희에게서 멀어진다.

“나 죽을 때 꼭 옆에 있어 줘”
“너도 나 죽을 때 꼭”


이렇게 죽음까지 약속했던 두 사람의 사랑은
“밥 천천히 먹는 것 지겹지도 않니?”
라며 은희에 대한 독설을 퍼붓고 드디어는 은희에게 “날 떠나 달라”며 무릎을 꿇고 애원함으로 절정에 이른다.
“개새끼”

은희는 이 한마디로 그녀의 아픈 마음을 대변한다.



영수가 떠났다.
그는 환락가에서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삶을 산다. 술과 여자에 빠지고 수연도 그의 욕망을 만족시키지 못한다. 이때 영수는 깊은 허무와 삶의 비애를 느낀다. 거의 폐인 수준으로 전락했을 때 비로소 영수는 은희를 떠올린다. 자신을 위해서 모든 것을 다 희생했던 여자. 그러나 모든 영화가 그렇듯이 이미 때는 늦었다. 은희는 영수에 대한 그리움과 원망 때문에 죽음을 코앞에 두고 있다. 산소 호흡기를 끼고 병상에 누워있는 은희를 영수가 쳐다본다. 두 사람의 눈동자가 마주친다. 은희의 눈에 눈물이 맺히고

“영수 씨 내가 모든 것을 다 용서할게”

라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인다. 은희의 눈이 감긴다. 이 영화에서 가장 아픈 장면이다.

사랑에도 높은 정신이 필요한 이유는 한 사람을 향한 사랑의 힘을 보기 때문이다. 은희의 사랑은 책임지는 것이었고 그 사랑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주었다. 그 죽음 앞에서 비로소 영수는 은희의 깊은 사랑을 깨닫고 오열한다. 언제나 소중한 것은 뒤늦게 깨달아지기에 슬픔이 더 크게 다가오는 법이다.



허진호 감독은 도시에서 육체의 쾌락을 탐닉하며 물질의 힘에 의존하는 삶은 결국 무의미한 것을 쫓다가 허무 속에서 파멸을 가져오는 과정을 냉철히 보여준다. 그러나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기에 자연 속에서 땀 흘려 농사를 짓고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자연과 벗하는 생활이야말로 우리를 건강하고 행복하게 해 준다는 것을 교훈으로 주지 않았을까?

물론 사랑하는 사람이 옆에 있을 때 가능하다. 그러기에 사랑의 힘은 무한하다. 언제나 허진호 감독은 왕가위 감독처럼 음악을 통해서 영화의 주제를 잘 표현한다. 영화의 후반과 마무리에 흘러나오는 한대수의 ‘행복의 나라로’의 가사를 음미하면 감독이 바라는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 느낄 수 있다.

‘창문을 열어라
춤추는 산들바람을 한 번 또 느껴보자
가벼운 풀밭 위로 나를 걷게 해 주세
봄과 새들의 소리 듣고 싶소.
울고 웃고 싶소. 내 마음을 만져 주
나는 행복의 나라로 갈 테야 ‘

- 한대수 ‘행복의 나라로’ 중에서 -


‘산들바람, 풀밭, 새들의 소리, 비와 천둥의 소리, 벽의 작은 창가, 아이들 소리, 고개 숙인 그대’ 등 우리의 삶에 행복을 주는 것은 육체의 욕망이나 물질의 탐욕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행복의 나라로 가는 것이다. 그 사랑의 힘이 우리 육체의 욕망을 제어한다. 그리고 바르게 사는 것이 무엇인지 영화관을 나서는 관객들에게 묻고 있다.

배경음악은 

영화 '행복' ost 중에서 
한대수의 '행복의 나라'로 입니다. 

https://youtu.be/vgpmL-ieL-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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