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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세일 Jul 17. 2023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어요

영화 '정사' 리뷰

정사(情事)

네이버 국어사전에 19+ 표시가 된 단어인데 뜻은 '남녀 사이에 벌이는 육체적인 사랑의 행위'라고 풀이되어있다. B급 영화에서나 어울릴 제목인데 이재용 감독은 과감하게 이 단어를 영화의 제목으로 사용했다. “여주인공 이미숙의 나신을 구경하기 위한 미끼, 아니면 킬링 타임용으로 적당한 영화” 

이런 생각 때문에 이 영화는 십 수년이 지나도록 제목만 기억되고 있었다. 어느 날 영화를 좋아하는 관객들이라면 너무나 익숙한 'manha de carnaval(카니발의 아침) 이 이 영화에 사용되었다는 것을 알고는 

“뭐야 그 좋은 곡을 모독하는 것 아니야?”

라고 폄하했던 ‘정사’를 심심하다는 이유로 아내 몰래 보고 있었다.


공항 - 사람들이 만나고 헤어지는 곳.
누구에게는 기쁜 장소가 될 수 도 있지만 반면에 가장 아픈 장소 일수도 있는 곳에서 두 사람은 우연히 만난다. 미국에서 출발한 로스앤젤레스 항공기가 도착했다는 안내방송과 함께 문이 열리면서 탑승객들이 출입구를 빠져나온다. 그들의 표정은 한결같이 밝다. 자신을 기다리던 사람들을 만나기 때문이다. 마지막까지 동생 지현(김민)을 기다리던 서현(이미숙)은 자신을 응시하는 우인(이정재)을 발견한다. 이때 배경음악으로 ‘Deja vu’가 흐른다. 오보에의 선율은 차분하고 아픔이 가득 묻어있다. 두 사람의 관계를 음악이 암시하는 것처럼 오늘 처음 보았지만 왠지 그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처럼 친근하게 다가오는 우인의 시선을 서현은 애써 무시하지만 이미 그녀의 가슴속에 한줄기 빛으로 자리 잡는다.


공항을 나서는데 지현으로부터 전화가 온다. 

“언니 미안해 공항으로 막 가려는데 일이 결정 났어. 귀국이 좀 늦어질 것 같으니까 언니가 나 대신에 우인씨와 함께 결혼 준비를 해줘” 

동생의 부탁을 받은 서현은 동생의 약혼자를 만난다. 놀랍게도 그는 공항에서 한 줄기 빛으로 다가온 우인이다.



모든 사랑의 시작이 30초 안에 결정된다는 것은 진실이다. 

사랑은 어느 순간 찾아오는 것이기에 거부할 수 없다. 동생의 결혼준비라는 공적인 일로 두 사람은 만나지만 점점 더 사적인 감정으로 변하고 애초부터 비극으로 잉태된 사랑은 그 결말이 파국으로 끝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멈출 수 없다. 마치 빛을 보면 뛰어드는 불나방처럼 시작된 사랑은 브레이크 없는 자동차처럼 비극이라는 사랑의 종말을 향해 달려간다.


그러기에 ‘정사’는 아픈 영화다. 아니 가슴이 시리다. 왜냐하면 화면은 두 사람의 사랑을 기쁨이 아닌 고통으로 표현하기 때문이다. 불륜 영화 특징 중의 하나는 여주인공이 가지고 있는 완벽한 행복을 깨트리는 것이다. 건축기사인 남편은 사회적인 성공을 이루었고 그는 일중독의 성향을 가지고 있지만 아내와 아무런 문제도 없다고 생각한다. 적당히 자신의 행복에 빠져있는 남편은 서현도 덩달아 행복할 것이라고 믿는다. 아내의 마음을 읽으려고 하지 않는 남편이기에 두 사람의 대화는 단절되어 있다.


누구나 가슴이 비어갈 때가 있지 않은가?
서현의 빈 가슴을 우인이 메우기 시작한다. 동생의 결혼준비로 두 사람은 만나지만 그들에게는 넘지 못할 장벽이 있다. 가정을 가진 여자가 동생의 남편 될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랑이 아무리 아름답고 고귀하다 할지라도 용납할 수 없는 불륜이다. 이 사실을 자각할 때마다 두 사람의 관계는 빨간 신호등 앞에 서있는 모습이다. 사랑이 아니고 불륜이라고 불리기에 영화는 어둡고 음악은 침울하고 두 사람의 대화는 나지막하고 짧다. 사랑이 주제인 영화의 아름다움은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와 사랑의 장면들이다. 영화를 보고 나온 뒤에 관객들은 “나도 저런 사랑을 해봤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이 있다. 그러나 서현과 우인의 대화는 어둡고 웃음이 없다. 그들은 남의 눈에 띄는 것을 두려워하고 아무도 모르게 사랑을 나누어야 한다. 동생으로부터 걸려온 전화를 받는 우인의 모습을 보면서 서현은 질투와 함께 자신의 사랑을 확인한다. 그리고 단호하게 말한다. 


“너무 멀리 왔나 봐요”


이성은 안 된다고 말하지만 가슴은 그 사람이 아니면 안 된다고 한다.

죽어가는 아버지 앞에서 서현은 이렇게 고백한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어요. 태어나서 처음으로
저 그 사람 너무 사랑해요. 너무 사랑해서 겁이 나요
그냥 떠나보내야 되겠죠. 그래야 되겠죠? “


떠나보내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그럴 수 없는 것이 사랑의 힘이다.
그리고 그 사랑은 자연히 육체를 허락하며 완벽한 사랑으로 이어진다. 비 오는 날 급작스러운 우인의 키스를 거부하지 못한 서현은 그때부터 마음이 요동치기 시작한다. 그리움이다.
우인이 아프다는 것을 알고 병문안을 간 서현은 그의 병간호를 하면서 사랑을 나눈다. 이재용 감독은 기교파다. 그는 두 사람의 사랑을 영상미보다는 숨결로 표현한다. 거칠어진 호흡, 그리고 짧은 신음이 사랑의 격렬함을 알게 한다.


스캔들? 조선남녀상렬지사’에서도 이재용 감독은 디테일하고 미장센에 뛰어난 솜씨를 보여주었다. 우인과 서현의 건조한 대사는 그들 사랑의 아픔이 표현되어 있고 감독이 추구하는 영상은 어둡다. 그 아픔 때문에 누구나 해서는 안 될 사랑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지만 영화의 결말은 그 아픈 사랑이 해피엔딩으로 끝날 것 같은 기대감을 갖게 한다.



“그놈 하고 살면 뭔가 달라질 것 같아” 


아내의 불륜을 안 남편의 분노에 찬 독설이지만 서현은 모든 것을 버리고 비행기에 오른다. 비록 지금과 달라지지 않는다 할지라도 서현은 처음 다가온 사랑을 택했다. 그 사랑에 박수를 보내고 싶은 것은 사랑을 만들어 가는 과정에 공감하기 때문이다. 거기에 일조한 것이 조성우의 음악이다. 처음 듣는 이름이기에 인터넷을 검색했더니 실력가다. <8월의 크리스마스>, <약속>, <정사>, <인정사정 볼 것 없다> 등이 그의 작품이다. 너무나도 귀에 익숙한 ‘카니발의 아침’과 변주를 통한 메인 테마의 반복, 아픔과 아련함이 느껴지는 조성우의 음악은 이 영화의 고급화에 절대적인 기여를 한다.


누구나 현실은 아니라 할지라도 마음속에서 아름다운 사랑을 꿈꾼다. 영화나 소설이 대리만족이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그래도 한 번쯤은 마음속으로 운명적인 사랑이 찾아왔으면 하는 기대감은 있지 않을까?


‘정사’ 영화의 제목은 원색적이고 B급 영화처럼 보이지만 고급스럽고 아련하고 느낌이 좋다. 그리고 빠져든다.


배경음악은 

영화 '정사' OST 중에서


'Deja Vu'입니다. 


https://youtu.be/3wc4CJ-sT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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