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와 함께 낙엽을 밟는다

단풍나무 길 걷기

by 이세일


1. 오늘 만남을 위해 5시 30분에 일어났다

날씨에 대해 걱정을 했는데 날씨는 잔뜩 흐리다고 한다. 이어폰, 야구모자, 보조배터리를 챙기고, 둘이서 함께 걸을 친구를 위해 설렘을 넣은 커피를 내려 텀블러에 넣는다. 혹시 나를 보고 싶어 하는 그 누군가가 있을 것이란 앙큼한 생각까지 하면 기분은 최고조로 높아진다. 아직 어둠으로 뒤덮인 거리를 걸으며 경전철을 타고 지하철로 바꿔 타며 서울역에 도착했다. 7시 52분 천안행 무궁화호에 승차했다.
1시간이라 할지라도 창밖을 보며 가을을 느낄 수 있기에 열차 여행은 언제나 두근거림이 있다.

아직 어둠이 남아 있는 서울역.
젊은 시절 통일호를 타고 동터오는 정동진 바닷가를 만날 때의 환희를 기억한다. 통일호였다. 인생의 중심을 잃은 사람, 낭만을 즐기려는 커플 등 청량리역에서 밤 11시에 출발하는 통일호 열차를 타고 떠났던 젊음은 기차가 사라진 것처럼 과거로만 남아 있다. 그나마 무궁화호가 구형 열차로 명맥을 이어가고 있기에 잊을 수 없는 소중한 자산이다. 기차는 출발하려고 시동을 걸어놓았고 의자로 전달되는 진동은 오직 이 열차에서만 느낄 수 있는 감성이다.

설렘 속에 기차가 출발하며 창밖으로 보이는 가을을 풍경은 다르다. 대청마루에서 편안히 앉아 바라보는 원경처럼 열차 안에서 바라보이는 풍경은 선택적 아름다움이다. 움직이기에 짧은 순간 눈동자는 카메라의 렌즈처럼 빠르게 한 장면을 포착해 낸다. 속도감을 자랑하는 KTX에서는 볼 수 없는 무궁화호만의 장점이다.


안내방송이 들린다.
”이 열차는 앞차에 길을 비켜주기 위해 3분 정도 정차하겠습니다.“
밤차를 타고 절망 속에 떠났던 중앙선이 위로가 되었던 것은 짧은 순간 정차한 기차에서 내려 먹었던 냄비우동의 기억이다. 내릴 수는 없지만, 머리는 글감을 만들기 위해 기민하게 움직이는데 핸드폰이 울린다. 내가 좋아하는 석환이다.

”석환아? 어디야?“
”옆을 봐“

바로 옆좌석에서 전화하는 석환의 모습이 보인다.
아! 반가움(그러나 뭐냐고요. 난 여친과의 만남을 고대하고 있는데 ㅎㅎ)

2. 낙엽을 밝으며 그대와 걷고 싶은 길



약속 장소에는 이미 많은 친구가 와 있다.
야외식탁에는 준비된 막걸리와 안주가 놓여 있다. 두 번째 만남이기에 얼굴이 눈에 들어오는 친구도 있지만, 아직 모르는 친구들이 대부분이다. 어색함을 이기기 위해 막걸리 한 잔을 달라고 했다. 두 잔을 마시고 얼굴이 익은 친구와 인사를 나누고 단풍나무 길로 걸음을 옮겼다.

이 길에 대한 사전 정보가 없기에 인류의 스승이신 네이버를 검색했더니
‘1995년 4월 직원들이 식목 행사로 독립기념관 경내에 단풍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이 나무들이 30년 가까이 자라 단풍 터널을 이루게 되었다고 한다.’
더 으쓱한 기분은 일본 단풍이 아니라 우리 고유 수종 청단풍이라는 것이다.

입구에 들어서며 함께 걸을 친구가 생겼다.
가을을 말할 때 오색단풍이라는 말로 아름다움을 이야기한다. 가을의 풍경은 생각의 조립이 아니라 눈으로 다가오는 느낌이기에 ”좋다!“란 감탄사 한 단어면 충분하다. 내 옆에 누군가 함께 걸을 수 있는 벗이 있다면 이 길의 주인공 될 수 있다. 그 친구와 함께 20대 시절 연애편지에 자주 인용했던 구르몽의 시를 읊조린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낙엽은 아주 부드러운 빛깔
너무나도 나지막한 목소리를 지니고 있다.’

시몬이라고 부를 수 있는 누군가가 옆에 있기에 발을 맞추어 천천히 걷는다. 누구나 낙엽을 밟고 감탄사를 연발할 수 있지만, 낙엽 밟는 소리를 듣는 것은 예민한 감성이 필요하다. 이때 필요한 것이 설렘을 받아줄 누군가 있어야 하고 취향이 비슷해야 한다.
낙엽 이야기를 하면 친구도 자신의 삶을 반추하며

”같이 낙엽을 밟으며 좋아했던 사람이 있었어“

지나갔기에 아련한 이야기가 육체적이거나, 즉물적이라면 우리의 삶은 멋지지 않다. 한순간 시인이 되어 둘이 함께 이 길을 걸으며 대화할 때 일기장에 그녀의 멋짐에 대해 한 줄 기록할 수 있다.


단풍나무 터널을 지나 철길까지 걷게 되었을 때 ”좋다“라는 감탄사를 터트렸다. 남아 있는 추억 중 소중하게 각인되어있는 것은 철길에 관한 것이다. 영화에서 흔히 보았던 사랑하는 연인이 두 손을 잡고 철로길을 걷는 모습, 기차 소리를 듣겠다고 귀를 대고 있을 때 박동하는 심장 소리, 동요 ‘기찻길 옆 오막살이’를 함께 불렀던 아이들.


철길에서 잠깐 쉬며 석환, 은숙과 함께 이야기를 나눌 때 누구를 위해 준비한 예가체프 커피를 꺼냈다. 두 친구가 향이 좋다고 했을 때 약간 으쓱 ㅎㅎ

”영국 왕실에서 마시던 커피래“

은숙 친구가 보스 스피커를 가지고 왔다며 음악을 듣자고 한다. 완전 내 취향이다. 석환 친구도 음악을 하기에 좀 더 가까워지는 계기가 된다. 은숙친구가 처음 들려준 라운지 음악은 분위기 짱이다. 창밖의 아름다운 풍경을 바라보며 커피 한 잔을 마실 때 사용하면 배경 음악으로 좋을 것이란 생각을 했다.

그다음 곡이 Sting의 ‘Shape Of My Heart’이다.

”나도 스팅 좋아하는데, 영화 라스베가스를 떠나며 의 니콜라스케이지가 보여준 삶의 절망을 고통스럽게 표현했던 스팅의 Angel Eyes도 좋아하는 곡이야“

같은 취향을 가지고 있기에 우리라는 단어를 사용할 수 있다. 음악을 좋아하는 석환, 은숙, 그리고 나. 좀 더 가까워진 사이가 아닐까?

3. 지란지교를 꿈꾸는 우리



얼굴도, 이름도 모르고 사는 거리도 멀지만 왜? 40명이 넘는 친구들이 단풍나무 길을 걸었을까?

이 질문에 대해 감성 시인 유안진은 이렇게 노래한다.

‘사람이 자기 아내나 남편, 제 형제나 제 자식하고만 사랑을 나눈다면 어찌 행복해질 수 있으랴. (중략) 그가 여성이어도 좋고 남성이어도 좋다. 나보다 나이가 많아도 좋고 동갑이거나 적어도 좋다. 다만 그의 인품이 맑은 강물처럼 조용하고 은근하며 깊고 신선하며, 예술과 인생을 소중히 여길 만큼 성숙한 사람이면 된다. 그는 반드시 잘 생길 필요가 없고, 수수한 멋을 알고 중후한 몸가짐을 할 수 있으면 된다. (지란지교 중에서)

우리가 함께 모이는 이유는 이유를 유안진 작가는 아름답게 표현한다.
’사랑, 행복, 인품, 인생, 성숙, 멋‘등
우리 나이에 가져야 할 덕목이다. 내적인 아름다움을 가진 친구를 만나면 큰 웃음이 있고 헤어지면 보고 싶은 그리움을 잔영(殘影)으로 남기게 된다. 오늘 만남을 통해 몇 사람의 이름을 기억했고, 친구의 모습을 뇌리에 각인시켰다. 그리고 전화번호에 한 사람의 이름을 등록했다.

과거의 추억만으로 사는 사람은 불행하다. 그에게 현재의 모습이 없기 때문이다. 또 아름다운 과거를 추억하지 못하는 사람도 행복하지 않다. 지난 삶의 편린들이 자신의 삶을 얼마나 풍요롭게 했는가를 모르기 때문이다. 가끔 추억이 필요한 이유다.

오늘 하루 자신의 일기장을 꺼내 몇 줄로 기록해 둔다면 삶은 추억의 책장을 넘기며 얻는 즐거움으로 넘친다. 오색으로 물든 단풍, 몇 사람의 얼굴과 이름, 함께 마신 막걸리로 인해 가까워진 친구들 때문에…. 가난하고 멋없는 삶이라 할지라도 모이면 빛나는 것이 우리 나이다.

단풍나무는 홀로 존재하며 자신의 멋을 뽐내는 것이 아니라 햇살을 받아 청, 황, 적, 백, 흑색으로 빛나는 다양한 아름다움 때문에 사람들이 찾는 것이 아닐까?
우리가 모이는 이유도 ”너는 빨간색, 너는 노란색, 너는 푸르름이야“ 라며 각자의 삶에 대한 인정과 칭찬, 격려가 있기에 가능하다.

오늘 기록할 수 있는 일기 제목이 있다면 잘 보낸 하루라 말할 수 있다. 거기에 너 때문이라고 누구를 특정하지는 못하지만 사람을 만나는 것은 설렘이 있기에 좋지 않을까?



배경음악은
'Shape Of My Heart,입니다.

https://youtu.be/XMRqRvcb6h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