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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세일 Oct 30. 2022

이제 남은 사랑을 지켜야 한다

도서 '사랑의 역사' 리뷰 


20대 시절 상처뿐인 사랑을 하는 친구들이 몇 명 있었다.
태생적인 아픔을 가지고 있는 불륜이었다. 30대 유부남 형사를 사랑했던 그녀는 하루에도 수십 번 변하는 자신의 마음을 달래기 위해 술에 취해 서럽게 울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손수건을 건네주는 것뿐이었다. 옆집에 살았던 또 한 명의 그녀는 부모의 반대라는 커다란 벽 앞에서 신음하고 있었다. 어느 날 아버지는 가위로 딸의 머리를 깎고 방안에 감금해 놓았지만, 그녀는 자신의 방 안에 있는 조그만 창문을 넘어 깎인 머리를 머플러로 감춘 채 가출해 버렸다.

난 그녀들의 아픈 사랑의 종말에 대해서 알고 싶지 않다. 아니 그녀들의 사랑이 “세상의 편견과 아픔을 이기고 행복하게 잘 살았대요!”라고 끝났다면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사랑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자신의 20대를 생각해 보라. 누구나 한 번쯤은 정염(情炎)에 불타던 미친 듯한 사랑이 있지 않았나?

자신의 격한 감정과 사랑의 아픔을 대신해 주었던 이정하의 시를 좋아했던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만났던 날보다 더 사랑했고
사랑했던 날보다
더 많은 날을 그리워했던 사람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다
함께 죽어도 좋다. 생각한 사람‘

- 이정하의 ‘한 사람을 사랑했네’ 중에서 -

이제는 사랑으로부터 자유롭기에 수십 번 이 시를 반복해 읽어도 김 빠진 맥주처럼 밍밍함으로 다가온다. 이유는 가슴이 식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학에서 만난 사랑은 과거형이 아니라 언제나 현재 진행형이기에 아직도 애잔하고 아픈 사랑 이야기를 읽으면 자신이 마치 로미오나 베르테르가 된 것 같은 착각에 빠지며 대리만족을 얻는다.



로미오와 줄리엣은 사랑의 시작에서 죽음까지 걸린 시간이 불과 5일이고,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는 쉰두 살의 프리랜서 사진작가 로버트 킨케이드와 마흔다섯 살 농부의 아내 프란체스카 존슨은 불과 나흘간 만나고 22년 동안 그리워했다. 15세 정도의 어린 나이였던 줄리엣이나 쉰두 살의 중년 로버트 킨케이드는 나이에 상관없이 똑같은 정염(情炎)에 불타올랐고 결국은 그 사랑 때문에 죽음을 맞고 참수형보다 고통스러웠을 그리움을 간직한 채 그의 유해는 로즈먼 다리 옆에 뿌려진다. 아마도 그는 죽어서도 연인 프란체스카 옆에 있고 싶었을 것이다. 그만큼 명작 속에 나타난 사랑은 깊고 넓고 높은데 가장 소중한 가치는 자기희생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여 기꺼이 자신의 모든 것을 던질 때 그 사랑은 전염되고 전율을 느낀다. 독자가 보았을 때는 엄청난 집착이고 어리석음처럼 보이지만 개츠비는 천박하고 이기적인 연인 데이지를 사랑했기에 30대 초반의 나이에 그녀 대신 총에 맞아 죽는다. 우리 시대의 가치관으론 개죽음처럼 보이는데 저자 피츠제럴드는 그에게 ‘위대한’ 이란 수식어를 붙이며 그의 사랑을 찬양한다. 개츠비의 짧은 생애에서 가장 소중한 가치는 오직 데이지뿐이었다.

그것뿐일까? 

첫사랑을 시작하기에 앞서 읽었던 황순원의 소나기는 그 흔한 키스 장면 하나 없는 짧은 소설이지만 키스보다 깊은 떨림으로 남아 있다.

좋아한다는 말을 한 것도 아니었지만 고등학교 시절 교회의 반주자였던 그녀는 하얀 칼라가 돋보이는 군청색 교복을 입고 있었다. 그녀가 치는 피아노 소리에 홀려 그 앞에 멍청히 서 있었을 때 내 마음을 알았는지 영화 ‘Love Story’의 주제를 연주할 때 그 소리는 시냇물의 맑은 소리처럼 내 가슴으로 흐르고 있었다. 난 가냘프고 기다란 그녀의 손가락에 가슴이 콩닥거리기 시작했다. 몇 권의 책을 선물하며 시간은 지나갔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온 겨울날 흰 눈이 펑펑 내리고 있던 날 그 아이가 눈을 뭉쳐 던졌을 때 마주친 눈동자는 선명한 핏자국처럼 아직도 가슴속에 기억되고 있다. 첫사랑이다. 이때부터 사랑은 저 흰 눈과 같이 순수할 때만 영원한 가치가 있다고 믿었다.

‘사랑의 역사’는 이렇게 누구나 한 번쯤은 경험했던 사랑에 대해서 추억하기에 딱 좋은 책이다. 왜냐하면, 이 책은 사랑을 6 part로 나뉘어 다양한 사랑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첫 번째는 짧지만 가장 강렬하게 남아 있는 첫사랑에 대해,
두 번째는 사랑을 얻기 위해 가장 필요한 용기에 대해,
세 번째는 사랑을 통해 성숙해지는 내면의 성숙에 대해,
네 번째는 가장 아프게 다가왔던 실패한 사랑인 이별에 대해,
다섯 번째는 우리 시대가 받아들이기 어려운 인정받지 못한 사랑 불륜에 대해,
여섯 번째는 결혼으로 완성된 행복한 사랑에 대해,

저자는 명작으로 알려진 34편의 작품을 선별하여 사랑의 가치와 의미, 그리고 우리 시대의 사랑에 대한 문제점을 제기하며 아름답게 사랑하는 법에 대해 안내하고 있다.

‘나이 드는 건 저절로 되지만, 아름답게 나이 드는 건 배워야 합니다. 사랑의 열정은 저절로 생기지만, 아름답게 사랑하는 법은 배워야 합니다.’

이 문장에 대해 공감하면서도 한편으로 계속 의구심이 가는 것은

“사랑을 배운다고 아름답게 사랑할 수 있냐?”



는 것이다. 이유는 사랑은 정염(情炎)이 없으면 시작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사랑은 격정적이고 광기를 동반한 무모함 때문에 목숨을 담보로 한다. 아직도 여운으로 남아 있는 영화 중의 하나가 Phaedra(페드라)다. 영화도 좋았지만, 남주인공인 알렉시스가 자신의 스포츠카를 몰고 좁은 해안도로를 미친 듯이 달릴 때 라디오에서 바흐의 ‘토카타와 푸가’가 흘러나온다. 그는 “라라라라” 하며 이 음악에 맞춰 미친 듯이 절규하며 사랑하는 여인(새엄마) 페드라를 부른다. 이때 알렉시스는 마주 오는 트럭을 들이받으며 벼랑 아래로 추락하며 생을 마감한다. 사랑의 격정을 이기지 못하고 비극적 죽음을 맞을 때 그의 나이는 겨우 24살이다.

명작 속에 나타난 사랑의 특징은 광기와 격정, 정염을 가지고 있다. 그러기에 그 사랑은 극단적인 선택을 한다. 안나 카레니나, 보바리, 베르테르 등이 대표적 인물이다. 이렇게 사랑이 불타오를 때는 이성으로 제어할 수 없다. 그러기에 명작에 나타난 사랑은 “그 후 두 사람은 행복하게 잘 살았대요”가 없다. 이유는 저자도 언급한 것처럼 감정적으로 느끼는 사랑은 2년을 넘기지 못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런 감정적인 사랑을 카섹시스(cathexis)라고 부르는데 그 뜻은 ‘애착의 한 형태로 상대에게 쏟는 모든 에너지의 총칭으로 관심, 끌림, 연민, 애정, 질투, 절망, 분노 등 사랑이 가지고 있는 모든 감정을 말한다. 저자는 이 특별한 에너지를 사랑과 관련된 감정일 뿐 사랑과 동등된 것으로 보지 않는다.

저자는 진정한 사랑을 이렇게 정의한다. ‘결국 사랑이란 나를 찾아가는 여행이다. 너를 통하여 나를 알아가는 과정, 너와 나와의 사랑이 아니었다면 까맣게 모르고 살았을 나의 오만과 편견, 네가 아니었으면 영원히 몰랐을 깨진 그릇같이 날카로운 질투와 분노, 너를 사랑하지 않았다면 발현되지 않았을 나의 허영심, 너는 나의 거울 그러므로 사랑은 돌아와 거울 앞에 선 서정주의 누님의 거울이다.’ (에필로그 중에서)

저자가 말하는 참다운 사랑의 모습은 상대를 통하여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이다. 마치 ‘먼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돌아와 자신의 모습을 마주하는 누님처럼 사랑을 객관화시킬 수 있을 때 비로소 사랑으로부터 배울 수 있다. 더 그리움으로 다가오지 않는 사랑, 밤을 지새운다고 할지라도 이제는 그녀 때문이 아니라는 현실을 인정할 때 사랑으로부터 자유로워진 것이다. 이때부터 자신의 입에서 지난 사랑에 관한 이야기가 흘러나온다.



“죽을 만큼 사랑했던 사람이 있었어. 그러나 이제는 아니야, 가슴은 쳐졌고 아랫배가 나왔다 할지라도 당신이 제일 예뻐” 

이렇게 아내에게 고백할 수 있다면 저자가 말한 것처럼 나를 찾아가는 여행의 종착지에 다다른 것은 아닐까?

격정적으로 시작한 사랑이 꽃비처럼 내린 후 그 자리에 열매가 맺히는 것처럼 이제 자신에게 남은 사랑은 감정이 아니라 이성으로, 의지로 지켜내야 할 사랑만이 남았다. 35년 이상을 함께 살아준 아내에 대한 고마움을 이 책 ‘사랑의 역사’로 확인할 수 있다면 사랑을 제대로 배운 것이다. 저자의 결론처럼 ‘사랑의 본질을 모른 체하는 백번의 사랑보다 사랑의 본질을 알고 하는 한 번의 사랑이 더욱 아름답다.’는 이 문장에 공감하는 것은 이제 자신에게 남은 것은 한 번의 사랑을 지키는 것이라는 깨달음이 있기 때문이다.

저자 남미영은 아동도서와 책 읽는 방법에 관한 책을 주로 쓴 작가이기에

“사랑을 주제로 한 문학적인 글이 어울릴까?”

라는 의구심이 있었지만, 그녀의 약력을 보면 오히려 이 분야에 전문가라는 생각이 든다. 사랑이라는 주제 때문일까? 모처럼 평온함, 행복, 사랑한다는 느낌으로 읽은 책이다. 젊은 친구들보다는 인생에 대하여 관조할 나이가 된 독자들이 읽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한 번의 사랑을 지키는 것이 가장 소중하고 아름답다는 가치를 깨닫게 해 주기 때문이다.

배경 음악은 사랑을 알기 전부터 좋아했던 영화 페드라 OST입니다. 

https://youtu.be/LGF0 BN6 vlRI


Phaedra 19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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