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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세일 Nov 26. 2022

가을엔 슬픈 영화 음악을 듣는다

도서 '가을' 리뷰 (절판)

극장에서 삶의 여유를 누리는 시간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
중장년층이 볼 수 있는 영화가 별로 없다는 핑계도 있을 수 있지만, OTT, TV, 인터넷 등이 영화관에서 누리는 즐거움을 대체하고 있다. 올봄인가? 피카디리 극장에서 '웨스트사이드 스토리'를 조조로 봤는데 극장 안의 관객이 나 홀로다. 영화에 대한 감동이 아니라 “난 부르주아야”란 생각에 기분이 들떴다. 나이 들면 매사가 귀찮고 사는 것에 별 의미를 부여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데 좋은 책이나 영화는 삶의 각성제가 된다.

‘가을’
이라는 담백한 제목의 책은 저자가 박신영인데 그녀는 동명이인의 이름난 아나운서도 아니고 영화배우도 아니다. 오직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인연을 소중히 생각하고 음악과 영화를 사랑하며 즐거운 글쓰기를 지향하는 무명작가다. 그녀는 누구나 바라고 있는 삶의 아름다움을 구체화하는 중이다. ‘영화 음악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봄, 여름, 가을, 겨울로 나눠 쓴 그녀의 책은 한 권으로 묶어도 좋을 것이란 생각을 하는데 굳이 4권으로 나눈 이유는 무엇일까?라는 질문을 저자에게 던지고 싶을 정도로 궁금하다. ‘영화 음악 이야기 - 가을’은 계절의 순서로 집필되었기에 3번째 해당하는 책이다.

‘오직 독서뿐’의 내용 중에 명나라의 양천상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그는 밤낮없이 책만 읽었는데 겨울밤에는 졸음을 쫓으려고 얼음물에 발을 담가 놓고 읽다가 그만 동상에 걸려 한쪽 발을 잃고 절름발이가 되었다는 일화를 읽으며 “이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일까? 아니면 미친 사람일까?“란 생각을 했는데 아무래도 미친 쪽에 가까운 것 같다. 그러나 올바로 미쳤기에 후대의 사람들에게 본보기를 주는 것은 아닐까?

가을이 좋은 이유는 양천상처럼 추위로 인해 동상에 걸릴 이유도 없고, 천고마비의 계절이라는 말처럼 가을은 무엇을 해도 좋은 계절이다. 남들의 이목을 끌기에는 지하철 독서가 좋지만 진정한 가을의 독서는 벤치에 앉아 따스한 햇볕을 맞으며 책을 읽는 것이 진정한 독서의 맛이다. ‘영화 음악 이야기 - 가을’은 제목처럼 가을에 어울리는 책이다. 조금은 쓸쓸한 느낌 때문에 장래에 대한 꿈보다는 회상이 더 어울리는 계절, 그리고 홀로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유혹이 있기에 가을은 로맨스 영화가 어울리지 않을까?



그리고 가슴으로 느끼는 슬픈 멜로디의 영화 음악을 기대한다. ‘연애 소설, 달콤한 인생, 열혈남아, 결혼은 미친 짓이다. 첨밀밀, 화양연화,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 아이 엠 샘, 라스베이거스를 떠나며, 레옹, '인생은 아름다워’ 등 영화를 좋아한다면 누구나 다 보고 감동이었어! 라고 말할 친숙한 영화들이기에 저자의 글을 읽으며 그 영화를 누구와 어디서 봤는지에 대한 추억들을 되새기는 재미가 있다. 그래서 가을은 회상이 어울리는 계절인 모양이다. 문제는 그 영화에 대한 단편적인 지식은 남아 있는데 기억되는 영화 음악은 기껏해야 열혈남아의 ‘백만 송이 장미’ 첨밀밀의 ‘월량대표아적심(月亮代表我的心)’ 화양연화의 ‘Quizas, Quizas, Quizas’ 라스베이거스를 떠나며의 ‘Angel eyes’ 레옹의 ‘Shape of My Heart’ 정도다. 이것을 보면 자신이 영화 음악에 대해 별로 관심이 없었다는 생각이 든다. 영화 한 편을 보고 감동이 된다면 그다음은 OST를 구매하는 것이 보편화되었는데 어느덧 그런 즐거움에서 상당히 멀어졌다. 아니 대표곡만 기억하기에 ‘Various OST’ 정도만 사들이는 정도로 끝난다. 그러나 진정한 영화 마니아라면 OST가 흐르던 장면들이 더 인상적으로 기억에 남아 있을 것이다. 영화 ‘미션’에서의 가브리엘의 오보에, ‘러브 스토리’의 Snow Frolic, 플래툰의 ‘현을 위한 아디지오’, 영화 탑건의 ‘Take My Breath Away’등은 음악으로 인해 지금도 그 장면들이 기억에 생생하다. 이것을 보면 아무리 많은 시간이 흘러도 음악은 화면을 떠나서 영원히 존재한다. 그러기에 영화 음악만을 다룬 책들이 대중적이지 않지만, 마니아들에게는 소중한 가치를 담고 있다.



저자 박신영은 레옹에 삽입되었던 스팅의 ‘Shape of My Heart’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앞서 소개한 ‘라스베이거스를 떠나며’에서도 스팅의 감미로운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지만, ‘레옹’에서의 분위기는 사뭇 다르다. 물론 기존의 스팅 곡을 작품에 삽입한 것이기에 작품의 감성을 담는 데에는 아쉬움이 느껴진다. 하지만,  파리 도심에서 벌어진 킬러와 소녀, 그리고 부패 경찰 사이의 긴장감을 고조시키는데 최적의 선곡으로 쓰였다.‘

힘 빼고 음유시인처럼 노래하는 스팅은 가을에 잘 어울리는 목소리다. 쓸쓸함이 가득 묻어난 목소리와 반복되는 멜로디는 레옹이 마지막 숨을 거둘 때 아프게 흐른다. 관객 대부분이 먹먹한 가슴으로 화면을 바라보는 것은 확실히 스팅의 힘이다. 이렇게 잘 삽입된 영화 음악 한 곡은 그 영화의 분위기와 주제를 멋지게 만들어 낸다. 레옹에서 그렇게 어렸던 나탈리 포트만(Natalie Portman)이 영화 ‘블랙 스완’에서 자신에게 안무를 가르쳐주었던 안무가 벤자민 마일피드(Benjamin Millepied)와 결혼해서 아이가 있는 것을 보면 세월이 많이 흘렀다. 자신이 본 영화 속의 주인공들은 아직도 그 모습으로 수십 년을 존재하고 지구의 종말이 오기까지 그 아름다움을 잃지 않겠지만 현실 속의 배우들은 나이 들어 늙고 죽음을 맞이한다. 자신도 그런 날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기에 가을은 외로운 계절이고 그 외로움은 영화 속에서 아름답게 반짝인다.



영화 ‘달콤한 인생’에서 선우(이병헌)는 희수(신민아)는 자신이 늦은 가을의 나뭇잎처럼 힘없이 떨어질 것을 알았지만 달콤한 꿈을 꾸고, 영화 ‘첨밀밀’은 ‘아주 달콤한’ 뜻이란 이름을 가지고 있지만, 여명과 장만옥의 사랑은 그렇게 달콤하진 않다. 현실은 아프고 힘들지만 그래도 그들은 많은 시간을 통해 사랑을 만들어 간다. ‘해리가 셀리를 만났을 때’는 맥 라이언의 귀염 때문에 정신이 없지만 오랜 시행착오를 거쳐 만들어 낸 사랑이 감동으로 남는다.

그래, 가을은 가을비처럼 촉촉이 가슴을 적시는 영화가 좋다. 조금 눈물샘도 자극하고, 자신이 영화 속의 주인공과 같은 착각을 일으키고, 영화관을 나서면 왠지 슬프게 끝난 사랑이 서러워 통증을 일으키는 영화가 어울린다. 그리고 그 사랑을 더욱 아프게 하는 슬픈 영화 음악이 있기에 가을은 홀로 있어도 좋은 계절이다. 왜냐하면 그 정도의 감성이라면 영화 속에서 만난 사랑이 더 좋고 아름답기 때문이다. 벌써 가을이 끝나간다. 가을과 겨울의 틈에 끼인 11월은 그래서 아쉬움이 크다. 영화 '라스베거스를 떠나며'는 삶의 희망이라고는 조금도 없기에 인생을 술로 마감하며 쓸쓸히 죽음을 맞이하는 황폐한 남자가 있다. 그 사람의 아픔을 사랑하며 마지막까지 남자의 희망이 되고자 했던 길거리의 여자가 그 옆에 있다. 그들이 보여준 사랑은 11월의 모습과 비슷하다. 삶과 죽음 사이에 끼어있기 때문이다. 스팅은 이 영화의 주제곡인 ‘Angel Eyes’를 통해 이렇게 노래한다.


'내 지친 마음은 의지할 곳이 없어요.

이곳에 천사의 눈이 없기 때문이에요.'


11월은 슬프고 아픈 죽음을 당한 젊은이들을 기억하고 싶다. 그들의 지친 마음을 우리가 받아주지 못하고 있으니까...


https://youtu.be/DXHfWf4CxX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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