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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세일 Jan 24. 2023

먼 곳에의 그리움

전혜린(1934~1965)

                                                               

‘그것이 헛된 일임을 안다. 그러나 동경과 기대 없이 살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무너져 버린 뒤에도 그리움은 슬픈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나는 새해가 올 때마다 기도드린다.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게 해 달라고……. 어떤 엄청난 일, 무시무시하도록 나를 압도시키는 일, 매혹하는 일, 한마디로 '기적'이 일어날 것을 나는 기대하고 있다. 올해도 마찬가지다. 모험 끝에는 허망이, 여행 끝에는 피곤만이 기다리고 있는 줄은 잘 안다.

그리움과 먼 곳으로 훌훌 떠나 버리고 싶은 갈망, 비하만의 시구(詩句)처럼 '식탁을 털고 나부끼는 머리를 하고' 아무 곳이나 떠나고 싶은 것이다. 먼 곳에의 그리움(Fernweh)! 모르는 얼굴과 마음과 언어 사이에서 혼자이고 싶은 마음! 텅 빈 위(胃)와 향수를 안고 돌로 포장된 음습한 길을 거닐고 싶은 욕망, 아무튼 낯익은 곳이 아닌 다른 곳, 모르는 곳에 존재하고 싶은 욕구가 항상 나에게는 있다.

포장마차를 타고 일생을 전전하고 사는 집시의 생활이 나에게는 가끔 이상적인 것으로 생각된다. 노래와 모닥불가의 춤과 사랑과 점치는 일로 보내는 짧은 생활, 짧은 생, 내 혈관 속에서 어쩌면 집시의 피가 한 방울 섞여 있을지도 모른다고 혼자 공상해 보고 웃기도 한다.

내 영혼에 언제나 고여 있는 이 그리움의 샘을 올해는 몇 개월 아니, 몇 주일 동안만이라도 채우고 싶다. 너무나 막연한 설계―아니 오히려 '반설계(反設計)'라는 편이 나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플랜은 그것이 미래의 불확실한 신비에 속해 있을 때만 찬란한 것이 아닐까? 이루어짐 같은 게 무슨 상관있으리오? 동경의 지속 속에서 나는 내 생명의 연소를 보고 그 불길이 타오르는 순간만으로 메워진 삶을 내년에도 설계하려는 것이다.

아름다운 꿈을 꿀 수 있는 특권이야말로 언제나 새해가 우리에게 주는 아마 유일의 선물이 아닌가 나는 생각해 본다.’



20대 시절 전혜린의 유고집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와 그녀의 일기를 모은 ‘이 모든 괴로움을 또다시’를 성경처럼 끼고 다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가까이 있는 사람들에게 책 선물로 가장 많이 나누어 주었던 책인데 연초가 되면 전혜린의 ‘먼 곳에의 그리움’을 읽습니다.

모든 천재의 비극은 다른 사람들보다 시대를 앞서 살았기에 보통 사람들은 느끼지 못하는 아픔이 있습니다. 나혜석이 그랬고, 이상과 김환기의 아내였던 변동림(김향한)도 그러했습니다.

31살의 나이로 짧은 생을 마감한 전혜린도 시대와의 불일치가 가장 큰 이유였을 것입니다.
명동의 ‘은성’에서 검은 옷, 검은 스카프를 두른 전혜린은 박인환, 이봉구, 오상순, 천상병 등과 어울려 막걸리를 마시며 문학과 인생을 이야기했을 것입니다.
담배를 꼬나물고 눈을 덮은 앞머리에 정리되지 않은 머리 맵시는 그 시대 반항의 아이콘이었습니다. 광기, 열정, 생에 대한 긍정 등 그녀의 삶은 산화하는 불꽃이었습니다.
새해가 되면 그녀처럼 살고 싶었기에 이 글을 좋아했는지도 모릅니다. 비단 저뿐만 아니라 문학을 좋아하는 친구라면 그녀는 요즘 말로 뮤즈였을 것입니다.

이제 가슴은 들뜨지 않지만 아름다운 꿈을 꿀 수 있다는 것은 새해가 주는 유일한 선물임이 틀림없습니다. 꿈 하나를 적습니다.

“주어진 삶을 살아내기”

https://youtu.be/25oXoRon05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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