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가을 가난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영화 '슬로우 비디오' 리뷰
아픈 사랑이 끝났을 때 남는 것은 상처와 아픔 그리움뿐인데 시간은 떨어진 낙엽을 한 순간에 쓸어가 버리는 바람처럼 사랑의 잔재들을 세탁해 버린다. 그러나 아직도 일기나 사진첩으로 남아있다면 문득 그 사랑이 보고 싶을 때가 있다. 한 사람을 향한 ‘그리움’ 이 남아있다면 이 계절은 풍성할 수 있다. 왜냐하면 세월의 흐름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엔틱 소품들처럼 아름다움으로 포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가을의 감성과 잘 어울리는 시인 이정하는 그 사랑을 이렇게 노래한다.
‘이룰 수는 없었지만 그를 사랑할 수 있었고, 또 그로 인해 가슴 아파할 수 있었다는 것은 어쩌면 내 인생의 가장 큰 행복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한 사람을 사랑했던 것이 행복한 이유가 되는 것은 이제 더 이상 사랑할 수 없는 없다는 것을 알 때 가능하다. 새로운 사랑을 기대할 수 없는 나이가 되었을 때 보는 영화가 감동이 큰 이유다.
“저렇게 아름다운 사랑이 나에게도 찾아오면 좋겠다!”
이런 갈망이 삶을 풍요롭게 하기에 아직도 로맨스 영화를 고집한다.
‘슬로우 비디오’ 는 가을에 추천하고 싶은 영화다. 이유는 뚜벅이 걸음으로 걷고 싶은 종로의 골목들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유럽의 작은 골목길과 노천카페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있기에 떠나고 싶은 충동이 있는데
"서울도 이렇게 먼진 곳이 있다니?" 놀라운 발견이다. 영화 속 서울의 골목길도 유럽에 뒤지지 않은 아름다움이 있다. 더군다나 만추의 가을로 가득한 영화의 풍경들은 감탄사를 연발하기에 충분하다.
영화는 종로구에 있는 동네들을 찬찬히 느리게 비취며 시작된다. ‘계동, 창의문로, 효자동, 이화로, 그리고 내 고향 동숭로’ 등의 골목길은 오늘도 갖가지 사연들을 만들어 내고 있다. 가을 햇살을 받아 빛나는 부암동은 여장부(차태현)와 수미(남상미)가 처음 만나는 곳이다. 언덕길 사이로 간간이 곱게 물든 단풍이 보이는데 골목의 아름다움이 좋다. 캔 커피 한잔을 마시는 수미의 얼굴엔 외로움이 가득 차 있고 그녀가 걷는 창의문로의 어두운 골목길은 기진해 있는 낙엽들이 그녀의 마음을 대변한다. 작은 카페 주인을 짝사랑하는 수미가 낡은 의자에 앉아 하염없이 쳐다보는 ‘BEANS TO COFFEE’가 자리한 곳은 홍대란다. 역시 이곳도 가을의 정취를 불어넣기 위해 낙엽들은 어지럽고 산만하게 널려져 있다. 고단한 수미의 내면을 보여주는 풍경이다.
오디션을 보고 나온 수미가 결과에 실망하고 있을 때 가을비는 세차게 내린다. 우산이 없었던 그녀가 가방으로 머리를 가린 채 총총걸음으로 걸을 때 뒤에서 우산을 받쳐 주는 여장부. 이곳은 너무 친숙한 대학로인데 내 고향이다. 지금은 옛 모습을 다 잃어버렸지만 유년시절의 기억 몇 가지는 아직 뇌리에 남아있다. 영화의 명장면 중 하나라 말할 수 있는 번화한 이화동의 모습이 보인다. 횡단보도를 건너던 수미가 오디션에 늦는 바람에 핸드폰으로 ‘참 예뻐요’를 부르는데 노래 제목만큼 수미는 예쁘다. 우리나라도 달동네마다 아름다운 그림을 그려 넣어 명소가 된 곳이 꽤 되는데 이화 벽화마을도 그중의 하나다. 높은 계단과 작은 집들이 얽혀 있는 이곳을 많은 관광객들이 찾는 것을 보면 누구에게나 향수가 있는 모양이다. 이렇게 호구조사하듯 영화의 배경을 다 찾을 수는 없지만 황금빛으로 물든 은행나무 길을 따라 걸으며 행복해하는 여장부와 수미의 얼굴이 클로즈업되는 곳을 소개하지 않을 수 없는데 경주의 도리마을 은행나무 숲이다. 홍천의 은행나무 숲길은 가봤기에 그 아름다움을 짐작할 수 있는데 이곳 정말 가보고 싶다. CG를 사용했겠지만 노란 은행나무 잎들이 꽃비처럼 내리는 장면은 화려함의 극치다. 거기에 두 사람의 사랑이 익어가는 모습은 부러움이기도 하고…
- 경주의 도리마을 은행나무 숲 -
줄거리가 좋아서, 배우들의 연기 때문에, 작품성이 뛰어나서 등 관객들은 나름대로 영화 한 편을 보고 감동받은 이유를 이야기한다. 그러나 영화 ‘슬로우 비디오’ 의 감동은 이것들보다 배경과 음악에 있다. 남상미가 부르는 ‘참 예쁘다’를 비롯해 강백수의 ‘보고 싶었어’는 이 영화의 감성에 마침표를 찍는다.
로맨스 영화의 4대 요소는 매력적인 주연배우, 달콤한 스토리, 아름다운 배경, 그리고 마음을 울리는 영화음악이라고 생각하는데 이 영화는 그 요소를 다 가지고 있다. 가을은 떠나간 사랑을 회상할 수도 있지만 새로운 사랑이 찾아올 것이란 기대감도 갖게 하는 계절이다.
유럽의 골목길은 꿈으로 존재하지만 서울의 골목길은 가벼운 배낭 하나를 메고 집을 나서면 현실이 될 수 있다. 만추의 계절이 주는 작은 외로움에 빠지고 싶다면 이 영화 속의 장소를 찾아 걷는 것도 좋겠다. 그곳에 사람과 고즈넉한 가을 풍경, 서러운 음악, 누군가와 함께 마시고 싶은 커피가 있기 때문이다. 가을을 느끼고 싶다면 이 영화 감동으로 다가온다.
이정하 시인은 다시 말한다.
‘결국, 살아가면서 유일한 가난함은 가슴에 사랑이 없는 것이겠지.
그래서 그대가 고맙다. 당신을 사랑하게 돼서 참으로 다행이다.‘
이 가을 가난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아직도 생각나는 당신이 있음으로…….
배경음악은
'슬로우비디오' OST 중에서
'참 예뻐요'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