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고요 Jun 24. 2024

나는 그만 불행하기로 결심했다

가족과 더는 연락을 하지 않겠다고 결심한 그날, 아빠는 내게 또다시 비난을 퍼부었다. 그날은 명절이었고, 시댁에 갔다가 친정에 조금 늦게 도착했다는 이유로 남편을 투명인간 취급하고, 나에겐 소리를 질러댔다.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화를 낼 상황이 아니었다. 명절이라 도로에는 차가 많았다. 천호동 끝에서 마포까지 오는 데는 족히 1시간이 넘게 걸릴 수밖에 없었다.

아빠는 자기 생각보다 늦게 오는 우리를 기다리는 동안 짜증이 났고, (내가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데) 왜 시댁에서 늦게 출발해서 사람을 기다리게 하며, 그러니 너희는 (당연히) 욕을 먹는 것이다. 이럴 거면 앞으로 내 집에 오지 말라는 말도 잊지 않고 쏟아냈다. 결혼 후 첫 명절이라 시댁에서 일부러 챙겨준 선물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나는 남편 앞에서 오물을 뒤 짚어 쓴 것처럼 창피하고 비참했다. 소리를 지르고 상대를 모욕하는 것이 자신의 권위를 세우는 것이라 여기는 저 사람이 내 아빠라는 것이, 아빠의 무례를 그 누구도 제지하지 않는 이 집구석이 치가 떨리게 싫었다.


그날 나는 더 이상 이 관계를 지속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잘못한 것도 없이 그의 눈치를 보고, 아무것도 아닌 일에 갑자기 불같이 화를 내는 사람의 비위를 맞추는 것도 진절머리가 났지만 내가 아닌 남편에게까지 무시와 경멸, 비난이 이어질까 봐 겁이 났다. 남편은 아빠의 행동에 미소로 대응할 정도의 마음이 큰 사람이지만 나 때문에 내가 겪었던 모욕을 그가 견디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다. 무엇보다 내가 처음으로 어렵게 선택한 행복이 아빠 때문에 깨지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다.


 도망치듯 집을 나서는 나를 놓칠 새라 엄마가 뒤따라 나왔다. 아빠는 현관을 나서는 내 뒷모습이 안 보일 때까지 소리를 질러댔다.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눈물을 쏟는 나를 보며 엄마는 한동안 아무 말도 없이 등만 쓰다듬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딸에 대한 안타까움과 남편에 대한 무력감이 공존해 있었다.


“나 이제 다시는 안 와.”


엄마의 손을 뿌리치며 모질게 말을 내뱉고는 남편 차에 올라탔다. 엄마는 남편에게 나를 잘 달래주라는 말을 쓸쓸하게 전할 뿐이었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나는 어린아이처럼 목놓아 울었다. 왜 나는 가족에게 이런 취급을 받아야 하는가. 왜 나는 부모에게 이런 절망을 느껴야 하는가. 왜 나는 가족과 인연을 끊어야 하는지, 남들처럼 평범하게 가족과 잘 지낼 수 없는 이 상황이 감정을 주체할 수 없을 만큼 슬펐다.


살면서 몇 번이나 결심했고 번번이 무너졌던 결심을 이제는 실행에 옮겨야 할 때라는 걸 깨달았다.

더는 나의 불행을 방치하며 머뭇거릴 수가  없었다. 나는 이제 남은 인생에서 가족을 지우기로 결심했고, 아빠의 핸드폰 번호를 차단버튼했다. 울며 잠든 그날, 오랜만에 깊게 잠들었다.





이전 04화 모든 선택은 나로부터 시작된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