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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요 Jul 01. 2024

아픈 것이 당연하다

내 불안의 시작점은 언제나 가족이었다. 모든 일을 할 때 부모의 반응을 살피게 되고, 그로 인해 화장실 휴지조차 마음대로 뜯을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다. 엄마를 향한 끊임없는 걱정과 오빠에 대한 불안까지 겹치며 도저히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눈을 뜨는 순간부터 잠이 드는 순간까지 숨 한 번 편하게 쉴 수 없게 되고 나서야 가족과의 단절을 결심하게 되었다.


그날 이후 5년이 조용히 지나갔다. 가족과 인연을 끊으면 큰일이 날 것 같았지만 삶은 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잔잔히 흘러갔다. 출근을 하고, 친구들을 만나고, TV를 보며 웃기도 하면서 정말 평온하기 그지없는 하루하루였다.

태어나면서부터 부모의 눈치를 보느라 고단했던 나는 가족과 연락을 끊자마자 곧바로 삶이 심플해진 것에 믿을 수 없을 만큼 놀랐다. 마음이 이렇게 편할 수 있다는 것에, 삶이 이토록 평화로울 수 있다는 것에, 그리고 다들 이렇게 살고 있었다는 것에 경이로움 마저 느꼈다. 무엇보다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하루 24시간을 온전히 나만의 시간으로 채울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큰 감동이었다


그러나 고요한 표면 아래에는 참 많은 감정의 소용돌이가 일고 있었다. 가족과 연락을 차단한 지 1년쯤 지날 무렵 아빠가 암에 걸렸다. 드문드문 연락을 주고받았던 엄마는 당장 집으로 와서 아빠와 화해하고 관계를 회복할 것을 요구했다. 며칠간 고민했지만 결국 거절했다.

그 후로도 여러 일들이 있었다. 엄마가 지하철 계단에서 굴러 뼈가 골절되고, 요양원에 계신 할머니는 점점 기억을 잃어가고 있었다. 가까운 친척 분이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도 뒤늦게 전해 들었다. 그때마다 죄책감이 강하게 들었지만 가족들의 어떠한 일에도 개입하지 않았다. 다시 그들과 조금이라도 이어지는 순간 겨우 잘라낸 연결고리가 다시 이어지는 건 시간문제였다. 그 고리를 끊어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가족과 연결된 모든 것으로부터 완전한 차단뿐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건너 건너 아는 사람들의 비난의 목소리가 직간접적으로 들려왔다.


“그래도 그러면 안 되는 거다.”

“아무리 부모가 잘못했어도 부모는 부모다.”

“그러다 벌 받는다. 다 너한테 돌아온다.”


모두들 나를 비난했다. 나는 그들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다행히 우리 집은 생각보다 더 잠잠했다. 처음부터 그 가족에 나는 아예 없었던 것처럼 누구도 내 이야기를 꺼내지 않고 누구도 나의 안부를 묻지 않는다. 바라던 바다.


나는 내가 괜찮은 줄 알았다. 이렇게 쭉 살아도 괜찮을 거 같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깨달았다. 누구보다 가장 독하게 나를 비난하는 사람은 다름 아닌 나였다. 부모를 등졌다는 죄책감, 가족과 인연을 끊었다는 배덕감은 나를 시도 때도 없이 짓눌렀다.

그리고 바로 지금부터가 가족과의 관계를 정리하고 나를 찾아가는 시작점이라는 걸 이때는 미처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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