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하면 뭐 먹고 살 거예요?”
“글쎄... 청소라도 해야 하나.”
종종 나이가 비슷한 직장 동료와 나누는 대화의 끝은 이렇듯 불안하고 씁쓸하다. 진지하게 생각해 봤다. 지금 당장 퇴사하면 뭘 할 수 있을까? 마음 같아선 집에서 글 쓰면서 출판을 준비하고 싶지만 그렇게 쉽게 책을 낼 수 있는 것도 아니거니와 책을 낸다고 해서 당장 수억 버는 것도 아닌데 집에서 멀뚱멀뚱 남편이 벌어다 주는 월급만 바라보고 있을 순 없었다. 프리랜서로 일 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럴만한 전문 기술이 있지도 않으니 어불성설이다. 결국 몸을 움직이는 일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였다. 어디 식당에서 파트타임 알바를 하거나 단순 사무 보조 업무 같은 당장 기술이 없어도 할 수 있는 무슨 일이든 하긴 해야 할 텐데, 그마저도 나보다 젊은 사람들과 경쟁해야 할 터였다. ‘다리도 잘 붓고 족저근막염도 있어서 오래 서서 하는 일은 젬병인데, 허리도 안 좋아서 구부리고 일하는 것도 힘든데... ’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어떤 날은 막막하기만 한 미래가 커다란 공포덩어리가 되어 침대에 누워있는 나를 짓눌렀다. 그런 밤엔 베란다로 나가 어두운 밤거리를 속절없이 내려다보며 멍을 때렸다. 사십 대의 나는 그야말로 ‘불안’ 그 자체였다.
사십대라는 나잇대가 그렇다. 뭔가 시작하기엔 늦은 것 같고 포기하기엔 이른 것 같은 나이. 그러면서도 우리는 종종 너무 쉽게 늙었음을 받아들인다. ‘이 나이에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이직을 해?’ 라거나 ’이 나이에 그런 열정이 어디 있냐 ‘며 지레 겁을 먹고 가슴속 작은 불씨도 냉큼 꺼버리기 일쑤다. 이직을 고민하던 시기, 나보다 다섯 살 정도 위인 부장님이 조심스럽게 조언을 건넸다.
누구보다 열의를 가지고 일을 하는 분임에도 ‘이제 나이가 많아서’, ‘열정적으로 일 할 자신이 없어서’ 점프업보다는 현실에 안주하고 있었다. 더는 치열하게 직장생활을 할 자신이 없다는 말도 덧붙였다. 나 역시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지금, 여기, 이 회사가 너무 편해서 새로운 곳으로의 이직이 두렵기만 했다. 이미 새로운 회사의 합격 통보까지 마친 상황이었지만 누군가 나를 잡아주기만을 바랐다.
“연봉 때문이라면, 대표님께 말씀드려 볼게요.”
때마침 회사에서는 내게 선택할 기회를 주었다. 연봉 1400만 원을 올리고 업계 1위 기업으로 이직하는 옵션과 연봉 500만 원을 올리고 현재 회사에 남는 옵션 중에서 갈팡질팡했다. 누가 봐도 이직하는 것은 ‘기회‘였음에도 선뜻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마흔을 넘긴 나이에 새로운 도전에 겁 없이 뛰어들기엔 너무 늦은 것 같다는 생각이 발목을 세게 잡고 있었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여기에 남는 선택 또한 지금 당장 몸이 편할 뿐 결국 유효기간이 정해져 있는 길이었다. 어쩌면 우리는 현실 안주라는 이름으로 현실 도피를 택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구글에서 [40대 이직]을 검색하니 나와 같은 고민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40대 이후 이직에 대한 두려움을 털어놓은 글들과 그에 동조하는 사람들, 그리고 큰 뜻이 없다면 현재 있는 곳에서 오래 붙어있는 게 제일이라는 것이 사람들의 공통적인 의견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40대 직장인의 현실인지도 모른다.
미래보다는 현재가 중요하고, 도전보다는 안정감을 더 우선시하는 40대들은 마치 직장인의 종착지점에 거의 다 다다른 것처럼 스스로 내릴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관련 검색어는 다른 이야길 하고 있었다. [40대에 시작할 수 있는 직업], [40대에 배울 수 있는 기술], [40대 제2의 직업], [40대 재취업 직업훈련]처럼 ‘시작’에 포커스 된 검색어가 상위권에 랭크되어 있었다. 이건 무엇을 의미할까? 직장 안에 있을 땐 다 끝난 것 같았지만 사회에 던져지면 다시 시작해야 하는 나이인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부터라도 생각을 바꿔야 한다. 궁지에 몰려 저 검색어를 클릭하기 전에 현재보다는 미래에 초점을 맞추고, 이제 막 시작하는 20대의 그 팔딱거리던 심장으로, 나의 40대를 ‘안전’한 영역에서 끄집어내 ‘용기’의 영역으로 밀어 넣어야 한다.
끝은 아직도 한참이나 남았다는 걸 잊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