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두근거림 Jan 11. 2017

눈이 부신, 사랑이란 이름으로도 가려지지 않는

2016년 1월 11일, 따스함

복사기 앞에 서서 출력물을 확인하고 있는 나에게 동료 A가 다가와 물었다

"오늘 술 한잔 어때요?"

그 물음에 참석할 수 없는 나의 사정을 설명했다.

"미안해요. 밀린 업무가 많아서 오늘은 힘들 것 같아요."

대답을 하고 곰곰이 생각해보니 요즘의 동료 A는 늘 어두웠다. 밝은 표정과 힘 있는 목소리가 그녀의 강점이었지만, 반복되는 상사와의 갈등 때문인지 서울 하늘의 별만큼이나 자취를 감추었다. 그런 동료 A가 주최하는 자리였으므로, 이전의 대답을 번복하고 참석했다. 조금이나마 위안이 될 수 있으면 좋겠다는 마음과 함께.


늘 그러하듯, 레이저라도 뿜어낼 것처럼 곤두서 있던 두 눈은 한 잔 술에 서서히 풀려갔다. 떠들썩한 분위기는 사무실에서의 우리를 잊게 했고, 미루었던 내일의 일들은 아무런 염려가 되지 않았다. 테이블 위에 놓여있던, 고작해야 비어있는 소주 10병과 맥주 2병이 전부였지만 우리는 고단했던 '일과'를 기억 속에서 지워가며 그 시간에 흠뻑 젖어들었다.  


"콘크리트 깔지 말지 말고 어서 마셔"


옆에 앉아있던 동료 B가 술을 재촉한다. 평소 애주가로 소문난 동료 B는 어디에나 있을 법한 '권유형'스타일이다. 자신이 한잔 마시면, 옆에 있는 사람도 한잔 마셔야 맛이 난다고 생각하는 유형. 나에게는 천적과도 같다. 나는 술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술이 몸에 잘 받지 않는 까닭도 있지만, 알딸딸한 수준을 넘어서 취하는 단계에 이르렀을 때의 느낌을 싫어한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취했을 때의 모습, 흔히 '주사'라고 부르는 이 행위가 상대방에게 종종 피해를 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좋은 마음으로 만났다가도 상대방의 고약한 주사를 확인하게 되면 '다시는 함께 마시지 말아야지'라며 다짐하게 되곤 한다.


당연히 나는 주사를 부려 본 적이 없다. 해 봐야 눈을 감고 잠이 드는 정도이지만, 술자리가 끝나는 대로 곧장 일어난다. 그래서 어느 정도까지의 술을 마시고도 온전한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지 알지 못한다. 대부분 소주나 맥주 몇 병 정도 마실 수 있다는 주량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나는 술을 많이 마시게 되면 상대방에게 피해를 줄 것만 같다는 노파심 때문에 한계에 다다른 적이 없다.


그런데, 오늘은 끝이라고 여길 수 있을 만큼 취하고 싶었다. 내 몸 하나 주체하지 못할까 봐 덜 마시던 습관이, 스스로 정해 놓은 한계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습관은 생활 전반에 영향을 미친다. 방 안이 어리 지운 사람이, 사무실 책상을 깨끗이 치웠을 리 만무하다. '나쁜 결과로 이어지면 어떡하지?'라고 상상하며 제대로 된 시작도 하기 전에 지레 겁을 먹고 포기하던 습관이, 술자리에서 까지 드러나는 것 같았다. 타인의 시선은 중요하지 않다고 하지만, 평소 동료들은 술자리에서의 나를 어떻게 보았을까. 술을 피하는 사람, 말이 적은 사람, 속내를 감추는 사람 그리고.


이런 생각 때문인지 나는 동료 B의 속도에 맞춰 술을 마셨고, 필름은 끊기지 않았지만 속이 뒤집힐 정도로 마셨다. 한참을, 풀린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던 나는 무기력하게 동료들이 취할 때까지 기다렸다. 그렇게 맞이한 취한 상태의 동료들은 우스꽝스러웠다. 테이블과 한 몸이었던 것처럼 엎드려 있는 동료, 진지한 표정으로 연신 욕을 하는 동료, 큰 목소리로 사무실에서 있었던 일들을 토해내는 동료 등 가지각색이었다. 무엇보다, 자연스러웠다. 때로는 흐트러지고, 나약한 모습 속에 서로의 진심을 확인할 수도 있다. 민폐라고 생각하는 그 순간, 생각의 크기만큼 멀어지는 게 사람 사이인가 보다. 그동안의 나, 어쩌면 두려움 속에서 진실된 나를 감추고 지내왔던 건 아닐까.




집으로 돌아가는 길. 문득, 그대가 떠올랐다. 한 없이 부족하기만 한 나를 한결 같이 아껴주는 그대. 다가오는 보름달이 그대의 얼굴 같아 나 또한 환하게 웃어 보였다. 고맙다고. 사랑한다고.


길었던, 그렇기에 기다려왔던 혼자 있는 시간. 취한 나를 감싸는 온기가 느껴진다. 어깨를 나란히 한 채 그대와 함께 걷는 것만 같다. 괜찮다며, 다독여줄 때의 눈빛이 생각난다. 그 빛이었으리라. 오늘의 내가 존재하는 이유. 살아가는 이유. 힘겨운 일들이 쏟아져 내릴지라도, 나아가는 이유.


겨울이라는 계절이 무색할 만큼 따뜻한 날씨가 이어지고 있다. 1년 중에 가장 추운 날이라는 '소한'이 지나고서도 추위를 느끼지 못하는 걸 보니 눈이 부신, 사랑이란 이름으로도 모두 가릴 수 없는 그대가 나의 마음에 봄을 틔웠나 보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