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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두근거림 Apr 26. 2017

기억해, 봄



낯선 바람이 불어온다. 어렴풋이 떠오르는, 잊고 있었던 지난 기억에 얼굴을 붉힌다. 되돌아온 바람은 벚꽃잎을 떨어트리고, 외투를 얇게 하였으며, 넋 나간 표정을 짓게 한다.


봄의 찬란했던 흔적들이 옅어져 간다. 누군가가 굳이 말해주지 않아도 우리는 느끼고 있다. 봄이 저물어가고 있음을, 여름이 다가오고 있음을.



지난 주말, 남산으로 벚꽃구경을 갔다. 절정을 지난 시기였다. 여러 차례 봄비가 내린 후였기 때문에 내가 기억하고 있는, 지난 봄날의 화창했던 벚꽃을 가시 볼 수 있으리란 기대는 적었다.


약속시간보다 조금 일찍 도착하여 남산 가는 버스정류장에 가 보았다. 수많은 인파가 정류장에 줄을 서 있었다. 최근 인터넷 뉴스로 보았던, 강남역 나이키 매장에서 한정판 신발을 구매하기 위해 서 있던 줄 만큼이나 대단했다. 제법 긴 줄이었음에도, 기다리는 사람들은 계속 늘어났다.



어쩌면, 떠나가는 봄이 아쉬워 작별의 인사를 나누러 가는 건 아닐까.


궁금했다. 그들은 왜 이리 늦게 봄을 확인하러 가는 걸까. 나야 차일피일 미루다 결국 오늘에 이르렀다고 하지만, 분명 저물어가는 봄이 아닌 화창한 봄을 볼 수 있었을 텐데.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떠나가는 봄이 아쉬워 작별의 인사를 나누러 가는 건 아닐까. 만나서 반가웠다고. 내년까지, 부디 건강히 지내라고 안부를 전하며.



그녀가 도착했다. 지난 한 주의 안부를 물으며, 버스를 타기 위한 대열에 합류했다. 서 너 개의 버스가 희뿌연 매연을 뿜어내며 우리 앞을 지나갔고, 출근길을 연상케 하는 버스에 올랐다. 오른손으로 손잡이를 잡고, 왼손으로 그녀의 어깨를 감쌌다. 오른손은 버스로부터, 왼손은 사람들로부터 그녀를 지키기 위해 잠시도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던 그녀. 버스에 오르기 전 활달한 모습이 사라진 그 모습에서 나는 저혈압을 떠올렸다. 그녀의 혈압은 이십 대 여성 평균보다 낮았다. 밀폐된 공간에 장시간 서 있으면 줄곧 얼굴이 창백해지며 어지러움을 호소했다. 그런 사실을 알기에 많이 힘들면 얘기하라고 정거장을 지나칠 때마다 얘기해도, 그녀는 연신 괜찮다며 나를 안심시켰다. 어렵게 탄 버스에서 내려야 한다는 나에 대한 미안함과 서둘러 봄을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느껴졌기에 묵묵히 기다렸다. 그러나 우리는 남산에 이르기까지 세 정거장을 남겨두고 내려야 했다. 그녀의 어지러움이 심해져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황급히 벤치를 찾아갔다. 새벽 겨울에 보았던 설경처럼 창백해진 그녀는 나의 무릎을 베개 삼아 누웠다. 그런 그녀에게 외투를 덮어 주었다. 미세먼지가 끼었다지만 근래들어 맑은 하늘과 혈색이 돌아오고 있는 그녀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봄이 가고, 또 오늘 하루가 가고 있지만 그녀의 건강보다 중요한 게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20분 정도의 시간이 지났을까. 미안한 듯 밝게 웃으며 이런저런 말을 건네던 그녀. 나는 그녀에게 밤에 갈 것을 제안했다. 처음 버스를 탄 정류장 만큼 이 곳에도 많은 인파가 남산에 가기 위해 줄을 서 있었고, 그녀에겐 벚꽃보다 안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잠시 후를 기약하며 근처에 있던 카페를 찾았다.





버스에서 내렸다. 밤이 되었지만 남산은 수많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남산 꼭대기에서 남산 도서관으로 내려가는 길. 밤이라 잘 보이지 않으면 어떡하지 하며 우려했던 그녀의 말대로 벚꽃은 흐릿했다. 그 이유가 벚꽃이 이미 져서인지, 시력이 좋지 않은 그녀가 안경을 끼지 않아서인지, 어두운 밤이어서 인지 확인할 수 없었지만.



아쉬워하던 그녀를 달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6년이란 시간을 만났지만, 그녀를 모두 알기에는 모자란 시간인가 보다. 그녀와 나는 약속이라도 한 듯 아무런 대화도 나누지 않은 채, 기나긴 길을 내려왔다. 나눴다고 해 봐야 만난 지 1년째가 되었던 그해 봄, 화창했던 벚꽃 아래서 걸었었지, 사진을 찍었지, 저 벤치에 앉았었지 하던 추억뿐이었다.


저 아래, 남산 도서관이 보인다. 벌써 다 왔네 라는 말을 건네며 조심스레 그녀의 얼굴을 살폈다.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가득 차 있었다. 그 눈물의 의미가 늦게나마 맞이한 봄이 반가워서 인지, 봄과의 이른 작별이 아쉬운 것인지 섣불리 짐작할 수 없었다. 뜻 모를 그녀의 눈물이 많은 상상을 남겼던 지난 주말의 밤. 저물어가는 봄과 떠오르고 있는 여름 사이에서 아련히, 아련히 기억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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