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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두근거림 Jun 07. 2017

두 평 남짓한 공간

두 평 남짓한 공간. 어질러진 책상과 두서없이 놓여있는 책, 얼룩진 창문에선 일말의 희망도 느껴지지 않는다. 대낮에 억지로 잠을 청하는 일은 대부분 한, 두 시간을 넘기기 어렵다. 밀려오는 현실에 묵직해진 가슴을 안고, 돌연 누나에게 선물 받은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고작 두 평 남짓한 공간인데, 이 곳은 나에게 정말 필요한 물건으로만 채워져 있을까?' 하고.


자의든 타의든 결국 나의 선택으로 들여오긴 했지만 채워갔다는 말보다 쌓아갔다는 말이 더 와 닿는다. 그렇다. 쌓아갔다. 서른 가까이 살아온 나의 삶처럼, 지나온 시간들은 나를 면밀하게 채우지 못했고 모든 노력은 그저 이력서에 한 줄 더하기 위한 것처럼 쌓아갔다.


부모님 집에 얹혀살며 처음 나의 방을 갖게 된 건 군대를 제대하고 누나가 결혼을 한 스물네 살 때이다. 지금은 이사를 왔지만 당시에는 18평 정도의 빌라에서 살았다. 집 내부는 세 개의 방과 한 개의 화장실,거실로 구성되어 있었다. 일자로 된 거실이었는데 폭이 워낙 좁다 보니, 거실과 붙어있던 내 방의 문과 벽을 허물어서 공간을 넓혔다. 세 개였던 방은 두 개가 되었고 문이 없는, 집에서 가장 큰 방에서 나는 지내게 되었다.


비록 어릴적 아버지처럼 한 방에서 여러 식구들이 사용해야 되는 어려움은 없었지만 있던 방, 나만의 방이 사라지는 건 괴로운 일이었다. 작은 문 하나가 사라졌을 뿐인데 나의 일상은 온통 가족에게 드러났다. 잠에서 깨어나 다시 잠에 들 때까지 가족의 눈길은 나를 벗어나지 않았다.


명랑하고 쾌활하여 주변에 친구가 끊이질 않는 사람에게도 혼자만의 시간은 필요하다. 분출하는 내면의 활화산을 가까이서 들여다볼 수 있는 방은, 혼자 있는 시간을 자연스럽게 만들어주는 장소이다. 만약 방이 없다면 누군가의 관심을 피해 세상 모든 존재에게 무관심하여, 되려 스스로를 비추어볼 수 있는 장소가 필요하다. 누구에게나 그런 장소가 있을 것이다. 이사 오기 전, 나에게는 화장실이 그러했다.


두 평 남짓한 공간. 그곳에는 가지런히 놓인 칫솔과 깨끗한 세면대, 그리고 구입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세탁기가 있었다. 노을빛을 연상케 하는 전구가 보통의 화장실답지 않게 은은하여, 씻거나 생리현상을 처리할 때도 오랜 시간 머물곤 했는데, 심신이 지쳐 이불을 덮어쓰고 우는 걸로서 해결되지 않는 날에는 으레 화장실로 가 세숫대야에 물을 받아 발을 담고 목욕탕 의자에 앉아 있었다.


따뜻한 물에 발을 담그고 내쉬는 한숨은 그야말로 행복이었다. 잠긴 문은 나의 허락 없이 열리지 않을 테고, 화장실에 머물고 있는 한 나는 세상과 단절될 수 있었다. 그러다가 고즈넉한 분위기에 감정이 격해지면 샤워기를 높은 곳에 고정하여 실컷 울곤 했다. 떨어지는 물은 빗소리처럼 들렸고, 발가벗은 채 세상을 거니는 부랑자처럼 나를 비장하게 만들었다.


마주 선 나를 보여주는 거울보다 화장실은 솔직했다. 겉모습으로는 알 수 없었던, 진짜 나를 보여주었으니까. 오늘에 이르러서야 내가 화장실을 방이라 생각했음을 알게 되었다. 비록 내가 원하는 형태는 아니었지만, 있는 그대로의 나를 꺼내볼 수 있는 공간이었으니까.     


두 평 남짓한 공간. 나를 꺼내어 보는 일이 헛된 희망일 것만 같아 두려워진 나는, 다만 앉아 있을 뿐이다. 아름다웠던 추억은 지난 한 때이며, 내일을 상상하기엔 해는 여전히 높은 곳에서 지켜볼 따름이다.


언제부턴가 일상이 되어버린 어지러운 머리나 두근거리는 심장은 타지에서 방황하는 나의 마음을 알고 있는 걸까. 알고 있다면 넌지시 말해주었으면 좋겠다. 현실이라는, 벗어날 수 없는 굴레에서 조금씩 나아갈 수 있도록.


노을 지는 세상. 흐르는 개울물에 발 담가 올려다보던 날들에는 희망이 있었다. 그 희망은 나로 하여금 나아갈 길을 일러 주었고, 부족할지라도 오늘의 나로 살게 도와주었다.


다시 한번 가 보고 싶다. 나를 위해 함께 울어주었던 그 공간. 나의 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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