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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두근거림 Mar 13. 2018

싹이 움트는 계절, 봄

봄을 진단하는 나만의 방법이 있다. 겨우내 얼어붙었던 땅이 녹고, 비가 내릴 때 맡을 수 있는 흙의 내음이 그것이다. 고소하게 퍼지는 그 내음은 나의 마음 깊숙이 스며들어 소식을 전한다. 싹이 움트는 계절, 봄이 돌아왔다고.


한해살이를 하는 식물들은 봄에 싹을 틔운다. 적당한 온도와 물, 부드러운 흙과 햇빛을 받으며 성장한다. 가을이 오면 열매를 맺어 씨앗을 만들고 서서히 시들어간다. 그 씨앗은 다시 봄이 오면 싹을 틔운다.


수많은 식물에는 저마다의 사연이 있다. 물을 충분히 공급받지 못하거나, 자라기에 알맞은 온도가 아니거나, 습기가 짙은 흙 또는 햇빛이 들어오지 않은 음습한 곳에서 자랄 때 고통을 겪는다. 물론, 올바른 성장의 기준에는 식물마다 차이가 있겠지만.


식물은 자신의 열매를 맺기 위해 노력한다. 상상했던 만큼 성장하기에 부족한 환경일지라도. 믿는다. 자신이 받았던 것처럼, 새봄에 태어날 싹을 위해 건강한 열매를 맺을 거라고. 일생을 바쳐, 맺힌 열매에는 숭고함이 깃들어 있다. 숭고함에는, 대대로 물려온 사랑이 숨 쉬고 있다.


식물은 씨앗의 성장을 못 보고 죽음을 맞이한다. 겨울에 접어들며 시들어가는 한해살이 식물이 할 수 있는 일은, 살아가며 겪었던 다양한 경험들을 일찍이 씨앗에게 전달하는 일이다. 세상을 잘 모르는 씨앗이 귀담아들을 리 없겠지만. 함께 생활하며 삶의 지혜를 하나씩 알려주면 좋을 텐데, 시간은 기다려주지 않는다.


식물이 자라고 죽는 과정은 사람과 유사하다. 태어나서 성장하고, 결혼하고, 죽음에 이르기까지를 우리는 생애라고 표현한다. 사람들 또한 저마다의 사연을 가지며 성장한다. 누군가는 적당한 온도와 충분한 물, 부드러운 흙과 따스한 햇빛을 받으며 성장한다. 반대로 과한 온도와 부족한 물, 딱딱한 흙이나 햇빛을 받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주어진 환경이 만족스럽지 못할 경우 우리는 누군가를 탓한다. 다른 누군가와 비교하며, 자신이 갖지 못한 것들을 되뇐다.


나는 왜 이렇게 살아갈까. 낮은 학력에, 가진 돈도 적고, 야근이 잦은 직업에 못생긴 얼굴까지. 사람들 앞에 당당히 내보일 수 있는 게 한 가지도 없다. 어찌나 생각이 많고 행동은 느린지 어떠한 일을 하던 실수 한다. 가슴 졸이며 사는, 나는 언제나 주늑들어 있다.


반복되는 자책에 지쳐있었다. 서른한 살이 되도록 나를 꾸짖었다. '왜 그렇게 밖에 못 해' 하며, 실수를 용납하지 않았다. 이러한 나를 누군가에게 털어놓고 싶었지만, 말해봐야 해결되는 건 없고 귀 기울여 들어줄 사람도 없었다. 끝을 향해 다가가는 기분이었다. 그동안 나를 지켜주었던 희망도, 꿈도 위로가 되지 않았으니까. 세상에 혼자 남겨졌다는, 그런 생각만 들었다.


답답한 마음에 집 밖으로 걸어나갔다. 그 길이 어디인지, 어디로 이어지는지, 끝에 무엇이 있는지 중요하지 않았다. 햇빛에 늘어지는 그림자를 보며 걷고 또 걸었다. 얼마쯤 걸었을까. 차오르는 숨을 고르기 위해 깊이 호흡하며 두 눈을 감았다. 들이쉬고 내쉬며, 한 호흡씩 숨을 쉬는 내가 느껴졌다. 그리고, 잊고 지내던 몇몇의 기억들이 눈 앞에 아른거렸다.


무릎이 까져 울고 있던 나에게 약을 발라주시던 어머니, 먹고 싶다는 음식을 퇴근길에 양손 가득 사 오시던 아버지. 잊고 지냈던 어린 시절의 나와 그 안에서 사랑받고 있는 모습들이 보였다.


그때의 나는 그걸 사랑이라 부르지 않았다. 당연한 거라 여겼다. 견디기 어려운 감정들이 들이치고, 문득 포기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을 때, 나는 과거에 경험했던 어떤 기억들을 떠올렸고, 그것을 사랑이 라고 생각했다.


부모의 사랑은 헌신적이다. 시행착오 없이 건강하고 밝게 자랐으면 하는 마음은, 모든 부모의 마음이다. 식물과 다르게 사람은 함께 성장한다. 부모의 품에 안겨 하나씩 배워간다. 어떻게 하면 나답게 살아갈 수 있는지.


"수호야, 편안하게 살아. 힘들 땐 잠시 쉬어도 괜찮아"


첫 번째 퇴사를 고민하던 나에게, 어머니는 말씀하셨다. 안 그래도 살기 힘든데 인상 써 가며 고민할 필요 없다며, 마음이 이끄는 대로 살라고.


"수호야, 넘어져도 괜찮아. 다시 일어나면 되지"


두 번째 취업이 잘 되지 않을 때, 등산을 가자던 아버지와 걷고 있을 때 들었다. 괴로워하던 나에게 어떤 말을 어떻게 할까, 오래 고민하신 듯 여러 위로의 말과 함께.


"수호야, 어서 일어나. 학교 가야지"


알람마저 꺼진 내 방에 고함이 들이친다. 학교 갈 시간을 넘겨 양치만 하고 뛰어야 간신히 늦지 않을 시간, 어머니는 말씀하셨다.


"수호야, 걸을 때 책 보면 안 된다. 알겠지."


새책을 사고 집으로 걸어가는 길에, 차도에서 책 안을 들여다보던 나에게 아버지는 말씀하셨다.


우리의 마음속에는 사랑이 숨 쉬고 있다. 잠시 하던 일을 멈추고, 느껴보자. 두 눈을 감고, 들이쉬고 내뱉는 호흡에 집중하다 보면 떠오르는 것들이 있다. 지나간 기억들 안에 '사랑'이라 일컫는 경험들이 하나씩, 영화의 한 장면처럼 펼쳐질 것이다.


하고 싶은 말들을 씨앗에 눌러 담았던 식물처럼, 당시에는 사랑이라 느끼지 못했던 여러 기억들이 온몸을 감싸고 있다는 걸 알게 된다. 어떠한 모습으로 태어나도, 비록 그 모습이 평범하지 않더라도 사랑받을 자격이 있다. 가진 게 적더라도, 남들 앞에 섰을 때 우스워 보인다 느낄지라도 기죽을 필요 없다. 조금 다른 환경에서 자란, 우리가 만들어 낸 환상이니까.


힘이 들고 지치는 날에는 마음에 물을 주자. 햇빛도 쬐고, 부드러운 흙을 밟으며 나를 위로해보자. 오로지 나를 생각하며, 돌아갈 길을 걱정하지 말고 있는 힘껏 걸어보자. 그 끝에, 내 모습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부모로부터 사랑받았던 나, 사랑받고 있는 나의 모습이.


알아요. 저에게 주신 사랑 있지 못할 거예요. 하지만 저에게는 과분한가 봐요. 남들은 저리 잘 살아가는데, 왜 저는 작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기만 할까요. 행복하고 싶어요. 늘 행복하기는 어렵겠지만, 불행 하마 저도 행복으로 나아가는 길이라 여기며 살고 싶어요. 그러나, 세상은 말씀과 같지 않아요. 괴로워요. 이렇게 계속 살아야 한다니, 아찔해요. 미래의 저의 모습은 끝맺지 못한 밑그림이에요. 어떻게 그려야 할지, 더 이상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거든요.


요즈음 제가 입버릇처럼 했던 말, 기억하시나요. 직장을 그만두고 싶다고. 알아요. 아무런 대안 없이 했던 말이라는 거. 그런데요, 가끔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제가 많이 달라졌거든요. 화가 넘치고, 짜증을 내고, 부정적인 말을 일삼는, 저를 보신 적 있으신가요. 하루에도 몇 번씩 튀어나오는 이 모습들이 튀어나오지 않게 기도하고 있어요.


대안 없이 그만두었다가 후회했던, 첫 번째 퇴사의 기억이 희미해질 만큼 쉬고 싶어요. 그러게요. 병을 얻느니, 그만둘까 봐요. 기간을 정해두고, 그때까지 최선을 다 해볼게요. 그래도 안 되겠으면 미리 계획을 세워둘게요. 무엇을 하며 살아가면 좋을지, 또 그것을 하기 위해 어떤 조건이나 자격이 필요한지 찾아볼게요. 걱정하시지 않도록.


가르쳐주셨지요. 저는 소중한 사람이라는 거. 어떠한 삶을 살아갈지라도 당당하고 떳떳하게 행동하라고. 저답게 살기 위해, 사람들의 만족을 위해 가꾸어진 지금의 모습을 포기할게요. 믿어주실 거죠. 바라시던 그 모습과 조금 다를지라도.


괴로운 마음에 집 밖을 걸었어요. 무려 4시간이나. 호흡이 가빠지고, 다리가 아파올 때 생각난 건 신기하게도 부모님이었어요. 어릴 적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저를 지켜주었던 숭고한 마음이 느껴졌어요. 그게 사랑인가 봐요. 사심 없이, 전적으로 위하는 마음이요.


저도 사랑하고 있었나 봐요. 부모님을요. 아닌 척하였지만, 오늘따라 두 분의 미소가 보고 싶네요. 걷는 도중에 굳은 땅에서 돋아나는 새싹을 못 보았다면, 저는 여전히 탓하고 있었을 거예요. 온갖 부정적인 말들을 붙여가면서요. 다행이에요. 때마침 봄이 오고, 움트는 싹을 보게 되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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