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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두근거림 Oct 24. 2018

또 하나의 계절을 보내며

점심시간, 사무실에서 나와 공원을 걸었다. 요즈음에는 주로 밀린 업무를 처리하거나 엎드려 잠을 청했던 것 같은데. 모니터 전원을 끄고, 감기는 눈을 비비며 한 걸음씩 걸으니 완연한 가을이 보인다. 단풍들은 언제부터 자신의 색으로 물들어 있었을까. 감나무에는 싱싱한 감이 한창이고, 알록달록한 세상을 뽐내기라도 하듯 하늘은 푸르게 웃는다. 걸음을 옮기다가, 이내 시들어버린 산수국을 보았다. 지난여름 화창하게 피어있던 산수국의 아름다움에 빠져 자주 이곳에 들르곤 했는데. 바쁘다는, 피곤하다는 핑계로 산수국에게 시간을 내어주지 못했다는 게 아쉬움으로 남는다.


20분 남짓한, 공원을 걷는 이 시간이 참 좋다. 음악이 흘러나오지 않는 이어폰에는 내 발소리와 숨소리가 가득 울려 퍼진다. 나에게 귀 기울이며 내딛는 걸음 하나, 하나에 집중하다 보면 어디로 갈지 언제 갈지 와 같은 고민들은 이내 사라진다. 걷다가 자리에 서서 잠시 눈을 감아보기도 하고, 양팔을 벌리고 크게 심호흡하기도 한다. 머리로부터 온 몸으로 퍼지는 뭉클한 마음은 말한다. '살아있구나, 내가 여기 살아있구나' 하고.


왜 이렇게 아등바등 살아가고 있을까, 나는. 퇴사에 대한 고민도 이미 몇 개월 전에 끝냈고, 지금의 일을 하면서는 도저히 다른 일이나 새로운 삶에 대해 생각할 겨를이 없으니,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무계획적이고 심지어 충동적이라고 비난할지언정 내 마음의 결정을 따르고자 했다. 하지만 나는 그만두겠다는 말이 입 언저리까지 차오를 때마다 주저하고 또 주저했다. 누군가가 나에게 할 것만 같은 말들을 되뇌며.


'어딜 가나 똑같은데 차라리 한 군데 오래 다니는 게 나아'

'31살 나이에 다른 데 취업하기 쉽지 않을걸'

'지금 그만두면 결혼은 언제 하게'

'같이 사는 가족도 생각해야지'


나는 늘 새로운 도전 앞에서 주저하다가 돌아서기 일쑤였다. 그럴싸한 변명들을 늘여대며 나 스스로를 합리화했다. 심지어는 누군가가 "왜 안 했어?"라고 물어볼 상황을 염두하여 대답할 거리들을 미리 생각하기도 했다. 지나고 나면 후회할 걸 알면서도, 나는 줄곧 마음이 아닌 머리의 의견을 따랐다. 그렇게, 오늘의 내가 되었다. 쓰러질 것처럼 비틀대면서도 무엇 하나 온전히 손에 잡지 못하는, 그런 내가.


우울하게만 느껴지는 나. 남들이 보기에는 얼마나 무기력해 보일까. 직장 내부를 돌아다닐 때마다 동료들과 눈이 마주칠까 고개를 숙이고, 대화를 이끌어갈 힘이 없어 점심은 잘 먹지 않으며, 출근할 때마다 인사도 없이 자리에 주저앉아 버리는 내가.


며칠 전에 보았던 하늘이 문득 떠올랐다. 미세먼지가 가득했던 그날의 서울 하늘은 모든 게 뿌옇게 보였었다. 구름도, 태양도, 달도. 그러나 미세먼지가 말끔히 걷힌 오늘 하늘에는 구름도, 태양도, 달도 변함없이 익숙한 위치에 자리하고 있었다. 나와 비슷하구나 싶었다. 괴롭고 힘든 일들이 겹쳐 원래의 내가 희미해질지라도, 제 자리에서 기다리고 있지 않을까. 언젠가 미세먼지가 걷히고 다시 만나게 될 진실된 나의 모습은.


다시 하늘을 보니 수많은 내 모습들이 떠 다닌다. 동료들과 정겹게 눈을 맞추고, 소소한 일상의 대화를 나누며 점심을 먹고, 출근하며 "안녕하세요"라는 인사와 함께 자리에 앉는 내가. 서랍 속에 놓아두었던 아끼는 물건을 오랜만에 발견하듯 가슴이 뭉클해지는 걸 느낀다. '그래, 이게 나지' 하는 생각을 하며 나는 걸음을 계속 옮겼다.


알람이 울린다. 이제 사무실로 돌아가야 할 시간. 공원을 채 한 바퀴도 돌지 못했는데, 당일치기 여행을 다녀온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가끔씩 인생이 태엽과 같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태엽으로 된 물건은 움직이기 위해 태엽을 감아야 하고, 움직임이 멈추면 다시 태엽을 감아야 할 시간이 필요하다. 치열한 경쟁으로 몸과 마음을 모두 다친 우리의 삶에도, 한 번씩 스스로를 되돌아볼 수 있는 유예시간이 있다면 어떨까. 그럴 수 있다면 오늘처럼 숨을 고르며 지나간 것들을 떠올려보기도 하고, 다가오는 것들을 옅은 미소와 함께 받아들일 수 있을 텐데.


'기운 내자' 하고 사람들 앞에 외칠 자신이 없는 나는, 두 주먹을 불끈 쥐며 사무실로 돌아간다. 바쁘더라도, 그 바쁨으로 인해 야근을 할 지라도 내일 점심시간이 되면 나는 다시 걸을 것이다. 지나간 어제를 떠올려보고, 다가오는 오늘을 받아들이기 위해. 어느새 익숙해진, 미소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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