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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두근거림 Jan 21. 2019

이제는 안녕을 말해야 될 때

"자팀 이겨라, 자팀 이겨라"


직원 연수의 하이라이트 시간, 레크리에이션이 시작되었다. '아자'라는 구호가 길다는 같은 조 사람들의 의견에, '자'로 결정된 구호는 다른 조보다 실속 있었다. 그러나 5개 조 중 가장 왼쪽에 배치된 탓에 진행자들의 눈에 잘 안 띄어, 경품이었던 술안주를 그다지 획득하지 못했다. 빈 그릇을 들고 애써 슬픈 표정을 지어가며 얻은 견과류가 유일한 수확이랄까.


"댄스파티를 시작합시다"


술에 취한 관리자가 크게 외쳤다. 레크리에이션이 모두 끝나고 조별로 수다를 떨며 한잔 하고 있었는데, 관리자의 목소리에 일순간 정적이 흘렀다. 앞에 앉아있던, 나보다 6살 많은 형이자 동료 A와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우리는 아무 말 없이 서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는 연수의 공식 행사를 마무리할 시간. 혹시라도 무대에 서 있는, 댄스파티를 열고자 하는 관리자가 나를 부를까 두려워 서둘러 숙소로 올라갔다.


배정받은 숙소에 도착하고 샤워를 마친 나는 못내 아쉬웠다. 퇴사를 앞두고 있는, 나에게는 이번이 마지막 연수이다. 연수 일정이 교육으로 가득 찼다며 불평했던 작년과 달리 매 순간이 소중했다. 사람들의 투덜거리는 모습, 즐거워하는 모습, 인상을 찌푸렸던 댄스파티 직전의 모습마저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연수를 위해 직장에 모여 차량으로 이동할 때부터 숙소로 들아오기 까지, 나는 사람들의 모습을 사진 찍어내듯 계속 담아냈다. 찰칵-하는 소리가 마음에 울릴 때마다 눈물이 고였다. 쏟아질까 두려웠던 나는 사람들과 대화할 때마다 쓸데없이 우스갯소리만 했다. 진심으로 동료들의 말 하나, 행동 하나에 관심을 기울이지 못했다. 나답지 못하게.


이불을 덮은 나는 생각했다. 친한 사람들과는 연락을 주고받으며 또 만날 수 있지만, 운동복을 입고 종이컵에 맥주를 따라 마시며 만날 수 있는 기회는 없을 것이다. 평소에 미워했던 사람들조차 오늘따라 왜 그렇게 반가워 보이던지. 그동안의 불편했던 감정이 어디론가 씻겨 내려간 것만 같았다. 이번 연수 때 보았던, 나와 내적으로 부딪쳤던 그 사람들은 정말 행복해 보였다. 그 모습을 보니, 그만두고 나면 더 이상 그들을 미워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렇게, 마음이 일러주었다. 좋은 사람들이라고. 단지 업무적으로, 구조적으로 부딪친 것일 뿐이라고.


생각이 깊어질 찰나에 띵동-하고, 초인종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댄스파티에 참여했을, 같은 방을 쓰는 동료가 뒤늦게 올라온 줄 알고 문을 열었는데 친하게 지내는 동료 2명이 서 있었다. 양 손에 술과 안주를 든 채로. 신기했다.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한 명, 두 명 모인 동료들이 우리 숙소에 둥그렇게 모여 앉았다. 뒤늦게 들어온 어떤 동료는 경품으로 탄 안주를 가져왔고, 또 다른 동료는 남은 안주들을 모두 모아서 가져왔다.


원으로 구성된 우리 안에는 별로 이야기를 나누어 본 적 없는 동료도, 단짝처럼 붙어 다니는 동료도 있었다. 그러나 이 자리에서는 나이도, 경력도, 그동안의 관계도 필요하지 않았다. 서로가 신체의 일부가 되듯 모여 앉아서 아무런 선입견 없이, 본래 하나였듯이 편하게 대화를 나누었다.


이곳에 모인 사람들 중에 A는 이곳에 입사하고 처음 같은 팀을 한 동료이다. 2016년이었던, 직장에서 맞이한 첫 해는 괴로웠다. 자기 확신이 넘치는 상사와 한 팀이 되어 내 의견을 무시받으며, 게임 속 아바타가 된 듯 상사의 의견에 따라 전적으로 지냈으니까. 그때 A는 나에게 힘이 되었다. 특히 협업을 하는 목요일이면 A와 함께 외부로 나가 일상과 관련된 사소한 이야기를 자주 나누었다. 바뀌지 않을 상사의 완고함과 그 아래에서 힘겨워했던 나에게 충고나 조언은 필요하지 않았다. 사무실에서 벗어나 '나'로서 살 수 있는 시간이 필요했을 뿐이다. 단 10분이라도 내 의지대로 웃고 떠들 수 있는, 그런 시간이.


밤 10시가 넘어서 까지 외근을 하면서도 서로 싫은 내색 없이,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에 맞춰 함께 노래를 부르던 그 날이 떠오른다. A도 기억하고 있을까. 팀의 대표로서 이 자리에 앉아있다고 말하는 그의 웃음소리와 떠들썩한 목소리만으로는 알 수 없었다.


2017년, 원하지 않게 부서가 변경되었다. 퇴사로 인한 공백을 남자 직원으로 메우기 위함이라고 관리자는 말했다. 그만두라는 소리처럼 들렸다. 설 명절을 하루 앞두고 통보한 이후에, 돌아오면 곧장 바뀐 부서의 업무를 수행하면 된다고 했으니까. 사직서를 쓸까 고민하던 찰나에, 지금 내 앞에서 피곤한 표정을 지으며 하품을 하는 동료 B를 만났다.


처음 B와 업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당시만 해도, 그는 기관에서 막내였다. 그러나 업무를 처리하는 방식은 입사 2년 차가 아닌, 숙련된 경력자의 것처럼 정확하고 꼼꼼했다. 궁금한 게 있을 때마다 그에게 찾아가 물었는데, 귀찮은 내색 없이 친절하게 알려주었다. 자주 찾아가서 부담스러워할 법도 한데 말이다. 그 덕분에 나는 이때까지 기관에 다닐 수 있었다. 만약 없었다면, 적응하지 못한 채 그만두었을 것이다. 업무 능력은 나이와 경력에 비례하지 않는다. 나보다 4살 어린 그에게서 업무에 대해 많은 걸 배울 수 있었다.


이 외에도 많은 동료들이 앉아있다. 한 명씩 더 소개하고 싶지만, 우울한 마음이 들어 잠시 접어두기로 했다. 이미 결정을 내린 상태에서 말하지 않는, 말하지 못하는 내가 동료들을 속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지만.


더 함께하고 싶다. 이들은 여전히 내 삶의 일부이고, 나에게 있어 중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는 안녕을 말해야 될 때가 다가오고 있다. 활짝 피어있던 내 얼굴 뒤로는 짙은 그림자가 더욱 커지고 있다. 퇴사 이후에 직면할 현실에 대한 걱정보다, 이들과 헤어지고 마주할 허전함이 더욱 걱정된다. 목표한 대로 좋은 상담사가 될 수 있을까. 이들에게 묻고 싶지만, 즐거워하는 그들의 모습을 보며 나는 가슴속에 묻는다. 적어도 이 밤에는, 동료인 '나'로서 온전하게 어울리고 싶었다.


새벽 2시가 넘어서야 정리가 된, 이 자리에서 나는 여운을 느낀다. 동료들과 함께 운동복 바지를 입고, 종이컵에 맥주를 따라 마시는 마지막 밤이었으니까. 한 명, 한 명의 동료를 떠올리며 용기를 내본다. 그들로 인해 오늘의 내가 있기에, 나를 이끌어 준 그들이기에 꿈을 따라가고자 한다. 언젠가 다시 보았을 때, 후회 없이 지내왔다고 고백할 수 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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