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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두근거림 Jun 29. 2019

그 밤을 기억합니다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 밤을. 도망치고 싶던 날이 있었습니다. 그 누구도 저를 알아볼 수 없는, 안전하고도 낯선 장소가 필요했습니다. 두 번째 퇴사를 하고 난 이후의 삶은 지지부진했습니다. 기대만큼의 휴식은 취하지 못하고, 앞으로 무엇을 해야 될까에 대한 고민으로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도망치고 싶었습니다. 밀려드는 일상의 압박을 감내할 자신이 없었으므로 며칠이라도, 그게 어렵다면 몇 시간만이라도 주변이 느껴지지 않는 곳에서 머물고 싶었습니다. 의식이 깨어있을 때라면 단 몇 초라도 '해내야 된다'라는 속삭임에서 벗어난 적이 없습니다. 뚜렷하지 않은 목소리였습니다만, 그 목소리는 피를 뜨겁게 달구고 심장을 요동치게 했습니다.


비행기 표 예매를 앞두고 이게 맞는 일일까 며칠간 고민했습니다. 시간의 제약이 없는 상황에서도 저는 선뜻 결정을 내리지 못했습니다. 여행을 떠난다는 게 퇴사할 때의 결심을 저버리고, 뒤로 물러서는 듯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돌이켜보면 여행이야말로 도망의 욕구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지만, 못내 두려웠습니다. 바쁘게, 가까운 누군가가 저를 보았을 때 치고 나간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미래를 맹목적으로 쫓아야 될 때, 한가하게 여행하는 사람으로 내비칠 자신이 없었습니다. 저 스스로도 받아들일 용기가 나질 않았습니다.


끝내 비행기표를 예매하고서도 침대에 누워 여행의 정당성을 찾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이틀 후 아침 비행기에 탑승했다가 다시 이틀 뒤 돌아오는 게 유일한 계획이자 목적이었습니다. 관람하고 싶은 곳들의 거리를 고려하여 숙소를 예약하는 것도 사치였습니다. 보고 싶은 것도, 먹고 싶은 것도, 가보고 싶은 곳도 없었습니다. 다음날이자, 여행을 하루 앞둔 늦은 밤이 되어서야 숙소를 정했습니다. 당일에 남는 숙소를 예약하면 저렴하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잘 곳을 두고 그런 아슬아슬한 상황을 유쾌하게 해결해 나갈 자신은 없었습니다.


4년 전, 제주에 다녀왔었습니다. 순전히 올레길을 걷기 위해 떠난 여행이었습니다. 저는 게스트하우스 세 곳을 하루씩 묵는 걸로 예약했습니다. 그 게스트하우스들은 올레길의 끝이자 처음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첫날은 예약 인원이 적어 2인실을 혼자 사용했고, 둘째 날에는 8인실에서 묵게 되었습니다. 이날 저는 올레길 7번 코스 시작 부근에서 마주친 사람을 끝나는 지점에서 다시 만나는 신기한 경험을 했습니다. 인연인가 싶어 먼저 아는 척을 하려다가 그냥 지나쳤습니다. 상대방이 나를 이상하게 보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지치고 굶주린 몸을 이끌고 해가 저물어 가는 풍경을 보며 숙소 앞까지 이동했는데, 그 사람이 보였습니다. 반가운 마음이 들었으나 애써 감추고 지나가려는 찰나에 그가 나에게 말을 걸어왔습니다. 알고 보니 그 날, 같은 숙소를 예약한 상황이었습니다.


서로가 혼자 떠난 여행이었기 때문에 그동안은 먹기 어려웠던 고깃집을 찾았습니다. 겁이 많은 제가 용케도 처음 만난 사람과 외지에서 식당을 함께 갔습니다. 그는 저보다 7살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동생이라는 호칭을 사용하며 인생에 대한 여러 조언을 저에게 해 주었습니다. 한사코 고깃값을 계산하려는 그를 만류하며 반씩 낼 수 있었습니다. 신세를 지면 다시 되갚아야 하는 저이기에 또 언제 만날지 모르는 그에게 밥을 얻어먹는 건 여간 불편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식사를 마치고 곧장 숙소로 가서 잠을 청했습니다. 다음 날, 행선지가 같은 곳까지 함께 가다가 헤어졌는데 그는 저에게 오늘 집으로 돌아가는 게 아쉽다며, 하루 더 시간이 있었다면 함께 여행을 더 하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그때 저는 만약 함께 여행한다면 그의 기대를 충족시킬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가 기대하는 바가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저는 그를 만족시킬 수 있는 어떠한 방법도 떠올리지 못했습니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저는 그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었습니다. 우연히 만났고, 곧 헤어지는 것도 알지만 그가 저에게 느끼는 기대를 충족시켜야 된다는 생각이 망치가 못을 향해 맹렬히 날아가듯 제 머리를 강타했습니다. 그와 헤어지고 저는 그 날 묵기로 되어있었던 게스트하우스를 취소하고 개인실을 예약했습니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 어렴풋이 친해지고 머지않아 헤어지는, 무엇을 기대하는지 모르는 사람을 위해, 그가 생각하는 '저'라는 모습을 취한다는 게 어려웠습니다. 그때 이후로 저는 여태껏 게스트하우스에서 잠을 청해본 적이 없습니다.


김포공항에 도착해서 먼저 한 것은 무엇을 할지 결정하는 일이었습니다. 이륙까지는 약 1시간 정도가 남아있었으므로, 그 안에 숙소에 가서 쉰다든지, 어디를 가본다든지 하는 계획이 필요했습니다. 고민 끝에 저는 4년 전과 마찬가지로 올레길 여행을 떠나기로 결심했습니다. 흘러가는 시간들을 숙소에서 초 단위로 하염없이 세어보느니, 저를 잊을 수 있는 그 무엇이라도 하는 게 필요했습니다.


제주에서의 첫날은 오후 1시 즈음 시작되었습니다.하고 싶은 게 없어서 정처 없이 제주 시내를 돌아다녔습니다. 제주를 갈 때마다 들렀던 올레시장의 사랑 분식 앞까지 갔다가 먹지는 않고 돌아오기도 했고, 주변 번화가들을 목적이 있는 사람처럼 쏘아 다니기도 했습니다. 저녁이 되어서야 그 날의 첫 끼니로 고기국수를 먹고 일찍 숙소에 들어갔습니다. 넓은 호텔방에 혼자 있으니, 그곳에서 감도는 적막함이 편안하고 좋았습니다. 온 세상이 저로서 꽉 찬 느낌을 받았습니다. 제가 그토록 찾던 그 느낌이었습니다. 첫날밤, 숙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진실된 저와 마주할 수 있었습니다. 식사를 마치고 돌아오던 길에 구입했던 맥주를 마시며 티비를 보았습니다. 장면, 장면이 또렷하게 보이며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늦은 시간, 새벽이 다 되어서 저는 잠에 들었습니다.


둘째 날 아침이 밝았습니다. 알람을 맞추지 않았지만 아침 7시 정도에 일어났습니다. 짐을 정리하고 숙소에서 나와 올레길 시작 지점으로 갔습니다. 첫날 묵었던 숙소에서, 이 날 묵을 숙소로 가는 길에 있던 17번 코스였습니다. 왜 이 길이어야만 하는지, 그 길에 무엇이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올레길에 있는 자연과 마주하며 첫날밤처럼 진실된 저를 만날 수 있지는 않을까 하는 기대가 다만 있었습니다.


시작부터 개운하지는 않았습니다. 도심 속을 가로지르는 도입 부분에서 저는 '내가 왜 이 길을 걸어야 하지'라는 의문을 품었습니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은 걸음을 더디게 하고 의욕을 상실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럼에도 저는 한 걸음씩 기어코 내디뎠습니다. 인적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외진 길도 있었고, 사람들이 옹기조기 모여 풍경을 감상하는 길도 있었으며, 가파른 오르막 길이 이어지며 고개를 절로 숙이게 만드는 길도 있었습니다. 점심을 먹었던 30분 남짓의 시간을 제외하고는 계속 걸었습니다. 버스를 타고 싶다는 생각도, 숙소에 가서 쉬고 싶다는 생각도, 무엇보다 왜 이 길을 걸어야 되나 하는 생각도 기꺼이 이겨냈습니다.


저녁이 다 되어서 도착한 숙소에 짐을 풀고, 근처 식당에서 저녁식사를 했습니다. 꼬들밥이나 질은밥과 같은 물의 농도에 따른 맛을 실감한 적이 없었으나, 이 날 저녁에 먹었던 밥은 고슬고슬하니 맛있었습니다. 비어 가는 밥그릇이, 줄어드는 반찬이 아쉬웠습니다. 식사를 마치고 월정리 해수욕장에 갔습니다. 어두운 해변가는 심해 같았습니다. 저는 그곳을 배회하다가 모래사장으로 내려가는 계단에 걸터앉았습니다. 끊임없이 밀려드는 파도를 보며, 말없이 다가오는 무형의 존재를 느끼며, 마음 언저리에 굳게 잠겨있던 자물쇠가 풀어지는 듯한 경험을 했습니다.


월정리의 고요는 열쇠가 되어 저를 어루만지고 있었나 봅니다. 자물쇠가 풀린 마음에는 슬픔, 괴로움, 무기력, 불안, 분노, 수치심과 같은 감정들이 쏟아졌습니다. 온몸을 두드렸습니다. 두 손을 마주 잡고, 수평선 부근을 바라보며 일렁이는 물결에 따라 저는 회한을 토해냈습니다. 그 이후의 시간, 언제 그 계단에서 일어났는지 라든가 어떻게 숙소로 돌아갔는지와 같은 과정은 잘 기억이 나질 않습니다. 왔던 길을 그대로 되돌아갔던 것 같습니다. 그날 밤, 저는 깊은 잠에 들었습니다. 하룻밤에도 몇 번씩 꾸는 게 꿈일지 언데, 저는 단언컨대 꿈을 꾸지 않았습니다. 잠에 들었고, 잠에서 깨었습니다.


그 밤을 기억합니다. 존재 없는 목소리가 저에게 기대하거나, 지시하려고 할 때면 그 시간을 떠올립니다. 제주에서의 밤으로부터 저는 비현실적인 생각을 품고 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아무도 저에게 도망치지 말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힘껏, 도망칠 수 있는 권리가 저에게 있습니다. 마음껏,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자유가 저에게 있습니다. 저녁 9시가 다 되어가는 이 시간에도 내일 새벽 비행기를 예매할 수도 있고, 그 비행기를 타고 여행하다가 밤이 다 되어서 숙소를 예약할 수도 있으며, 그 숙소에서 만난 사람과 일상의 이야기를 스스럼없이 터 놓을 수도 있습니다. 다가서게 되었습니다. 저에게. 마침내.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 밤을.

그 날, 그 순간의 전율을 되뇌며

진실되고 자유로운 제가 되어

새롭게, 나날이 눈부시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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