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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두근거림 Aug 06. 2019

나의 친절은

관계를 맺기 위한 수단이자 받고 싶었던 모습

타인에게 유독 친절한 사람들이 있다. 이러한 사람들은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친절을 베푼다. 필요하다면 자신의 일을 뒷전으로 미루고 기꺼이 돕는다.


자의에서 나오는 친절은 주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 모두에게 유익하다. 주는 사람은 주었다는 사실에 만족할 뿐 기대하지 않는다. 받는 사람은 도움을 받았다는 불편감 없이 어려움을 해결한다. 내가 사람들에게 주는 친절은 자의가 아닌가 보다. 되돌려 받을 무언가를 기대하기 때문이다.


전화번호부를 보면 나와 인연을 맺은 사람들이 있다. 학교에서, 직장에서, 모임에서 만난 사람들로 수두룩하다. 그중에서 가깝다고 생각되는 이름들을 유심히 들여다본다. 대부분 그때는 가까웠지만 서서히 멀어진 사람들이다. 연락하기도 어렵고, 연락한다고 해서 관계를 지속하기는 더욱 어렵다. 공통분모가 없기 때문이다.


그 사람들과의 추억을 떠올려보면, 관계의 첫 매듭은 나의 친절에서 시작되는 경우가 많았다. 자존감이 낮고, 불안을 자주 느끼며,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를 밥 먹듯이 의식하는 내가 관계를 맺기 위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이기도 했다.


어떻게 하면 환심을 살 수 있을지에 대해 고민하며 행동했다. 친절을 통해 그 사람이 즐거워하는 걸 지켜보는 것도 좋았지만, 내가 그들과의 관계를 이어가는 수단이라는 사실이 더욱 중요했다. 그래서였을까. 나의 친절이 닿지 않는 곳에서 지내는 사람들과의 관계는 유지하기 어려웠다.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알아야 관계 유지를 위한 친절을, 아니 가식적인 접촉을 계속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친절한 사람일까. 주변에서는 친절하다고 이야기하지만, 아니라는 것을 나는 안다. 사람들에게 주었던 나의 친절은 관계를 잇는 징검다리임과 동시에, 과거의 다른 누군가에게서 받고 싶었던 모습이기 때문이다.


힘겨운 일이 있을 때에도 누군가를 위해 웃어 보였던 이유는, 과거의 그 사람이 나에게 웃어주기를 바랐기 때문이었다. 여러 감정들이 마음속을 들쑤셔도 잠자코 누군가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던 이유는, 과거의 그 사람이 나를 무조건적으로 수용해주기를 바랐기 때문이었다.


나에게 어떤 일이 생겨도, 비록 그 일이 내가 저지른 잘못이라 할 지라도 "괜찮아" 하며 다독여주는 존재가 있었다면. 자애로운 눈빛을 하고 말 끝마다 "그랬구나", "많이 힘들었겠구나"라고 말하며 귀 기울여 주는 존재가 있었다면. 괴로운 날에 마음이 가벼워질 때까지 곁에 남아 위로해 주는 존재가 있었다면, 나 자신에 대해 확신을 가지고 관계를 만들어가지는 않았을까.


오늘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나에게 말한다. 내가 듣고 싶어 했던 말을. 나에게 필요했던 말을. 다른 사람들보다 나에게 더 해 주고 싶었던 말을.


괜찮아. 그랬구나. 많이 힘들었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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