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두근거림 Aug 09. 2019

상처를 지우개로 지워나가자

공부할 때면 주로 단색 볼펜을 사용한다. 특히 모나미 검정 볼펜을 좋아했다. 대학생 때는 가방 한편에 두세 개씩 넣고 다니며 공부했었다. 글씨도 잘 써지고, 무게도 가볍고, 저렴한 가격은 친구에게 빌려주었다가 잃어버려도 부담이 되지 않았다.


대학원에 들어간다며 누나가 선물해 준 필기구에는샤프가 끼어 있었다. 중학교 때 이후로 처음 만져보았던 것 같다. 제법 무거웠지만, 쓸 만한 일이 생기지 않을까 싶어 필통에 넣어두었었다.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다가 문득 필통 안에 있던 샤프가 눈에 띄어 사용했었다. 꺼내든지 몇 분이나 흘렀을까. 나는 샤프가 주는 매력에 금세 빠져들었다. 먼저, 볼펜보다 옅은 색감은 나를 강하게 드러내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아서 좋았다. 또한, 부드러운 감촉은 필기할 때 편리했다. 글씨들이 내 생각을 막힘없이 표현하는 듯한 느낌을 받기도 했다. 그중에서도 특히 좋았단 점은, 샤프로 적었던 글자들은 볼펜과 달리 흔적이 덜 남게 지울 수 있다는 것이었다.


볼펜을 사용하다가 내용을 고쳐야 될 일이 생기면 우리는 수정테이프를 꺼내 든다. 하지만, 수정테이프가 덮인 자리에 글자를 쓰고 나면 되려 지저분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글자 한 가운데에 겹겹이 칠해진 진한 흰색이 눈에 띄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수정테이프 안의 글자는 지워지지 않고 그대로 남아있다. 그저 가리는 것일 뿐이니까.


샤프로 적은 글자를 고치기 위해 우리는 지우개를 사용한다. 지우고 나면 종이에는 옅은 흔적만 남는다. 우리는 그 위에 새로운 글자들로 채워나갈 수 있다. 비록 이전의 흔적들을 말끔히 없애는 것은 어렵겠지만.


우리의 마음을 종이라고 생각해보자. 마음에 남아있는 상처, 즉 볼펜의 흔적을 말끔히 지울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럴 수 없다. 수정테이프를 사용하는 건 상처 받은 일을 덮어두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상처를 받을만한 일은 우리의 일상에 가득하다. 하나의 작은 활동이라도 타인과 연결되는 순간 우리는 상처를 받곤 한다. 누가 잘못했는가를 따지는 것은 나중의 일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상처를 받았다는 사실이다.


별 것 아니라고, 내가 잘못한 것이라고, 그럴 수 있다고 하며 우리는 애써 잊으려 한다. 그러나, 충분한 시간과 관심을 가지고 돌보지 않는다면, 이는 글자 위의 수정테이프와 같다. 사라지지 않은 상처의 글자들이 그 자리에 선명하게 남아있기 때문이다.


샤프를 꺼내 들고, 최근에 상처 받았던 일들을 종이에 적어보자. 다 적은 뒤에 그 글자들을 자세히 들여다보자. 당시의 상황을 곰곰이 생각해보며 지우개로 하나씩 지워나가자. 글자들의 흔적만 옅게 남았다면, 그 위에 현재 느끼고 있는 감정들을 남김없이 써보자. 화가 났고, 불쾌했고, 슬펐고, 짜증이 났던, 그때의 그 생생한 감정들을.


지긋이 바라보며, 위로하자. 여전히 상처로 남아있는 그 감정들에 머물며, 격려하자.


상처가 되는 경험을 볼펜이 아닌 샤프로 남겨두는 연습을 시작하자. 자책하지 말고, 스스로에게 관대해지자. 물론, 살아가며 아무런 상처를 받지 않는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인생은 길고 우리의 의도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옅은 색으로 적어두고, 조금씩 지워나가자. 우리는 쓰라린 상처 위에 다가올 내일을 적어나갈 수 있는, 용기 있는 사람들이니까.


이전 14화 나의 친절은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