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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두근거림 Jul 23. 2020

그래서, 어떻게 하고 싶은가요?

대학교 1학년 때였다. 다소 늦은 감이 있지만 이때부터 나는 외모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외출할 때면 옷이며, 가방이며, 안경까지 눈에 거슬리지 않는 게 없었다. 입었다가, 멨다가, 썼다가 벗기를 여러 번. 가진 보기가 빈약했던 나는 개중에서 하나를 꾸역꾸역 골라 외출을 감행했었다.


특히 머리스타일에 대한 고민이 깊었다. 돼지털처럼 두꺼운 모발과 반곱슬 머리는 나의 콤플렉스였다. 요즘에는 드라이기와 왁스를 이용하여 차분한 형태를 유지하지만, 그 시절에는 꾸밀 것처럼 생기지 않았는데 외모에 신경 쓴다는 인상을 사람들에게 줄까 봐 부스스한 머리를 자연스럽게 하고 다녔다.


고민이 깊어질수록 미용실을 자주 옮겨 다녔다. 또래 친구들은 홍대나 신촌처럼 번화가에 있는 미용실을 주로 이용했는데, 나는 동네 미용실을 고집했다. 자신을 꾸밀 줄 아는 사람들 틈에 끼어, 세련된 미용사 선생님의 낯선 용어를 들으며, 원하는 스타일이라고는 "깔끔하게요." 밖에 모르는 내가 당황하고 쑥스러움을 느끼게 될 상황이 겁이 났기 때문이다.   


아주머니들이 적어 보이는 동네 미용실이라면 한 번씩은 이용했던 것 같다. 나는 언제나 깔끔하게 잘라달라고 요청했고, 미용사 선생님은 깔끔하게 잘라주었다. 그러나 20살이었던 내가 원하는 깔끔과 50대에 가까워 보이는 미용사 선생님이 알고 있는 깔끔은 달랐다.


머리를 다 자르고 난 뒤에 "어때요?"라고 묻는 말에 "괜찮은 것 같아요."라고 대답하고 집으로 돌아와 거울 앞에 설 때면 후회했다. '덜 잘라달라고 할 걸.', '더 잘라달라고 할 걸.' 하며 다시는 그 미용실에 가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이러한 행동을 하던 나를 동네 미용실 두루 살리기 프로젝트의 일환이라며 애써 포장했었다.


아니었다. 내가 원하는 스타일은 늘 있었다. 단 한 번도 기대 없이 미용실을 들어간 적이 없었다. 드라마 속 남자 주인공의 머리스타일을 따라 하고자 사진을 보여주며 "이렇게 잘라주세요." 라며 말하려고 했던 적도 있었다.

연예인과 엄연히 다른 내 외모를 보며 '네가 이런 스타일로 자른다고?'라고 생각할까 봐 핸드폰을 꺼내 들지 못했지만.


미용사 선생님들의 잘못은 없다. 내가 다만 원하는 스타일을 뚜렷하게 말하지 않았고, 원하는 미용실을 찾아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비칠까 하는 생각들로 젊음을 제한했다. 마음에 드는 머리스타일을 하고서는 더 멋지게, 세련되게, 내가 원하는 모습에 가깝게 살아갈 수도 있었는데.   




군대에 다녀오고 서른두 살 때까지의 나에게는 관심병이 생긴 듯했다. 누가 말하지 않아도 최선을 다해 꾸몄으니까. 동네 편의점을 갈 때에도 볼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가던 사람처럼 깔끔하게 차려입고, 하천으로 조깅을 갈 때에도 어차피 운동복을 입을 텐데 연신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미용실에서 연예인 사진을 보여준 적 또한 무수히 많다.  


더 젊을 때 꾸미고 다니지 못한 것에 대한 보상심리였을까. 길가던 사람들이 나를 한 번이라도 더 봐줬으면 하는 마음이 있는 것처럼 치장에 열을 올렸다. '진작에 꾸미고 다닐걸' 하는 생각이 요즈음 자주 든다. 그랬다면 지난날에 대한 후회를 더 일찍 덜어내지 않았을까. 아무리 꾸며도 어차피 사람들의 관심 밖이라는 걸 알았을 테니까.

 

사람들은 자기 자신 외에는 크게 관심을 갖지 않는다. 눈으로 다른 사람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살핀다. 깜박이는 눈이, 기울이는 상체가, 끄덕이는 고개가 나의 어떤 모습에서 비롯되었는지 신경을 곤두세운다. 묻지 않으면 알 수 없지만 의미를 부여한다.


그렇게 한 사람, 한 사람을 의식하다 보면 사람들의 시선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사실 그 시선조차 나를 향하고 있지 않지만, 향하고 있는 거라는 잘못된 인식이 나를 움츠러들게 만들었다. 이제 나는 제 모습으로 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애써 흉내 내지도, 감추려 하지도 않는다. 어떻게 보일까 보다, 어떻게 하고 싶은 가에 초점을 맞추면 해야 될 행동이 쉽게 정해지는 걸 알게 되었으니까.  


누군가 옆으로 지나가면 아예 의식하지 않을 수는 없지만, 되도록 편하게 지나가려고 노력한다. 서로 갈 길 가는 사이인데 굳이 의식하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있을까. 그래도 열심히 꾸민 나를 알아봐 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완전히 가시지는 않는다. 나에게는 아직 관심병이 남아있는 걸까.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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