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상담센터에서 인턴을 수료했다. 센터장님이 나누어주시는 수료증을 받고, 동료들의 축하를 받으며 지난했던 1년의 과정은 마무리되었다. 이어서 자원상담사를 하게 되었다. 자원상담사는 봉사활동을 하듯 상담을 하는 상담사를 의미한다. 대학이라는 안정적인 곳에서 수퍼바이저의 지도를 받으며 안전하게 상담을 할 수 있기에 나름대로 매력적인 직급이었다. 인턴으로 근무할 때는 주 3일을 센터에 나가야 했다. 반면에 자원상담자가 되니 상담 일정이 있는 날에만 출근하면 되었다. 그렇다 보니 주에 하루나 이틀을 근무하게 되기도 했고, 근무하지 않아도 되는 경우가 생기기도 했다.
근무하는 날이 줄어든 만큼 인턴 시절에 비해 여유가 생겼다. 그렇지만 이 시기에는 논문을 작성하고 있기도 했고, 상담 관련 자격증을 준비하고 있었던 터라 상대적인 의미이기는 했다. 그래도 상담 일정을 제외하고는 필요에 따라 스케줄을 조정할 수 있는 일들이 대부분이었다. 나는 다른 일들을 미루고서라도 병원에 다녀와야겠다고 결심했다. 인턴 때부터 괴로워했던 열감 때문이었다. 코로나 확진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던 그때는 몸 상태가 평소랑 다르다 싶으면 너 나할 것 없이 코로나 검사를 받으러 다니던 시기였다. 학생상담센터는 학생들이 수시로 오가는 곳이었으므로 코로나에 있어서는 보수적인 편이었다. 센터 안으로 들어오기 위해서라면 누구든 비치된 체온계로 열을 재던 게 일상이었다.
한 번은 내 체온이 37.5도가 넘어 학교 보건소에 보고하고 PCR 검사를 받으러 다녀온 날도 있었다. 학교 관계자들이 검사 결과를 숨죽여 기다렸다는 후문도 나중에 들을 수 있었다. 그 뒤로도 체온이 37.0도를 넘기는 날이 많았다. 때로는 체온을 재지는 않았지만, 이마에서 전해지는 뜨거운 느낌만으로 열이 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기도 했다. 이러한 나의 몸 상태를 알면서도 미루기를 반복하다가 일 년만에 가정의학과에서 진료를 받았다. 의사 선생님과 20분 정도 대화를 나누고 소변검사와 피검사를 진행했다. 한 주 뒤에 검사 결과를 들으러 병원에 방문했다. 의사 선생님은 "어서 오세요" 인사하며 나를 반겼다. 검사에서는 특별한 이상은 발견되지 않았다고 했다. 다만 영양실조에 가까운 상태라는 얘기를 들었다. "건장할 나이에 어떻게 이런 일이.." 하며 말을 이어가던 의사 선생님의 놀란 표정은 여전히 또렷하다.
이어서 내가 사용했던 '열감'이라는 표현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의사 선생님은 내가 얘기했던 여러 스트레스 상황과 열감을 연결 지어 해석했다. 열감이라는 것은 실제 열이 난다기보다는 열이 나는 느낌에 가깝다고 했다. 그리고 나는 실제 열이 나는 정도보다 열이 난다고 느끼는 정도가 큰 편이라고 했다. 이런저런 상황과 이유들을 근거로 불안장애가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든다고 했다. 이미 상당히 진행되었을 수 있으며 필요하다면 다른 병원을 소개해준다고도 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많은 생각이 들었다. 결론은 '그럴 수도 있겠다'였다. 예민한 성격의 나는 불안할 일들이 참 많았다. 초등학교 때 처음 탔던 엘리베이터가 멈추거나 추락하는 상상으로 진땀을 뺐던 일은 불안 역사의 시작이었다. '소풍에서 같이 다닐 친구가 없으면 어떡하지?' 하는 생각은 야외 활동에 대한 추억보다 선명하다. 가족 중에 누군가가 밤늦게까지 집에 들어오지 않으면 혼자 아파트 정문에서 하염없이 기다리기도 했다. 교실에서는 수업에 집중해야 할 시간에 '친구들로부터 소외되면 어떡하지?'와 같은 생각에 휩싸였고, 회사에서는 '예전에 했던 일중에 내가 모르는 실수가 발견되는 것은 아닐까?' 하며 지난 서류들을 검토한 적도 있었다.
첫 책을 출간할 때는 평소보다 불안감이 심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이대로는 나에게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개인상담을 받기도 했다. 이처럼 나의 불안 역사는 일일이 나열하기 어려울 정도로 다양하고도 길다. 그렇지만 가정의학과에서 열을 쟀을 때는 36.7도 정도가 나와 의사 선생님은 실제 체온보다 내가 지각하는 정도에 초점을 맞추고 '열감'을 해석했다. 사실 지난 일 년 동안 체온이 높게 나온 날이 그렇지 않은 날보다 많았다. 동료들이 37.0도가 나온 체온계를 보며 "오늘은 낮은 편이네요"라고 말했던 숱한 날들이 이를 증명한다. 하지만 불안장애에 가까운 증상을 그간 보여왔던 것 또한 사실이었다. 체온을 재지 않아서 열이 나는지, 아닌지 정확히 모르는 날에도 몸 상태가 좋지 않다고 짐작한 날도 있었으니, 열이 난다고 지각하는 나의 느낌에 포인트를 두는 것이 어쩌면 더 적절하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일반적으로 불안장애는 우울장애와 함께 나타날 가능성이 크다고 알려져 있다. 미국 정신의학회(American Psychiatric Association)의 정신장애 진단 통계 편람 5판(DSM-5)에서는 불안장애를 여러 하위 유형으로 구분하고 있다. 그중에서 범불안장애는 과도한 걱정과 불안이 6개월 이상 지속되며, 이러한 걱정을 통제하기 어렵다고 느끼거나, 다양한 부적응적 증상으로 심각한 고통을 겪으며 사회적으로나 직업적으로 적응에 어려움을 겪는 상태일 때에 진단을 내린다고 한다. 물론 전문가와의 상담과 진단 과정을 거쳐야 정확하게 알 수 있는 부분이지만, 나는 범불안장애 진단 기준을 보며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우울증과 마찬가지로 진단만 받지 않았을 뿐 나의 최근, 아니 그간의 삶을 대표하는 문장들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불안은 조카들과의 관계에서도 자주 나타났다. 부모님에게도 차 오는지 잘 살피며 다니라고 말하던 나였다. 그런 내게 조카들의 움직임은 당장에라도 사고가 일어날 것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아파트 단지를 뛰어다니는 조카들을 진정시키고자 머리카락을 흩날리던 나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숨이 가빠온다. 내가 할 때에는 괜찮은 행동도 이상하게 조카들이 하면 불안하게 느껴졌다. 경사가 완만한 내리막을 조카들이 뛰어갈 때에도 '넘어지지는 않을까?' 걱정하고, 미끄럼틀에서 내려올 때에도 '착지하다가 다치지는 않을까?', 그네에 탄 조카들을 뒤에서 밀어주다가도 '떨어지게 되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이 기습적으로 떠올랐다. 반면에 우준이와 서준이는 거리낌 없어 보였다. 그들을 둘러싼 환경이 모두 탐구의 대상처럼 느껴지는 듯했다. 새로운 장난감을 보게 되면 때때로 겁을 먹기도 했지만, 대부분 호기심을 보였다. 또한 새로운 장소에 가게 되면 때때로 낯설어했지만, 대부분 흥미를 보였다. 내가 불안을 느끼는 것과는 관계없이 우준이와 서준이는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세상에 적응해가고 있었다.
하루는 외식을 하다가 우준이의 손가락이 미닫이 문에 찧은 적이 있었다. 우준이는 두 뼘만큼 열린 문을 오른손으로 힘껏 닫다가 문홈에 있던 왼쪽 엄지손가락에 새까만 멍이 들었다. 우준이는 크게 울었다. 엄마의 품에 안겨 위로를 받았지만, 그러한 위로로도 아픔은 쉽게 가라앉지 않는 듯했다. 상처는 오랫동안 우준이의 손톱을 까맣게 물들였다. 하지만 우준이는 다친 지 며칠이나 되었다고 다시 호기심을 발산하며 활동하기 시작했다. 동네를 비틀거리며 뛰다가 뒤에 있던 나에게 "봤지, 봤지?" 자랑하기도 하고, 놀이터에서 서준이와 달리기 시합을 하며 시소 주변을 아슬아슬하게 지나치기도 했다. 이처럼 위험한 순간에 노출되기도 하고, 실제로 다치는 상황을 경험하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시도하는 조카들을 보며 깨달은 것이 있었다. 불안하다고 해서 새로운 일에 도전하지 않으면 불만족스러운 상황은 나아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불안에 민감한 나에게 '새로움'이란 표현은 위험천만하다. 여행을 좋아하고 싶은 마음이 큰 '나'이지만, 혼자서 해외로 떠나본 적은 없었다. 무섭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나의 일상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새로운 활동을 시도하는 경우를 적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대표적인 예로는 글쓰기가 있다. 처음에는 내가 쓴 글을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것이 어려웠다. 어떻게 받아들일지 좀처럼 예상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비교적 솔직하게 쓴 내 글을 읽고 나라는 사람에 대해 누군가 오해를 하는 상황은 상상만으로도 끔찍했다. 하지만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싶다는 마음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을 공개하는 위험을 무릅쓰게 만들었다.
우리는 때때로 우리의 욕구를 부인한다. 살아가는 것을 벅차다고 느낄수록 우리의 근원적인 욕구는 소외당한다. 시선을 외부에 둘수록 저마다의 욕구는 내면에서 일어났다가 '반짝'하는 사이에 사라진다. 나에게 여행이란 '사랑'에 대한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귀중한 수단이다. 나는 새로운 사람과 낯선 지역을 좋아한다. 발바닥으로 하는 여행을 또한 좋아하고, 그곳에서 경험할 수 있는 동그랗고 각진 삶의 모든 순간들을 애정한다. 그러나 여행을 통해 사랑을 느끼고 싶다는 마음은 잠시, 갈 수 없다는 불안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가득 채운다. '너 여행 가서 짐을 모두 도둑맞으면 어쩌려고 그래?', '낯선 사람과 친해졌다가 큰 사기라도 당하면?', '핸드폰이 터지지 않는 곳에서 길이라도 잃어버리면 어떡하지?' 같은 생각들은 여행이 웬 말이냐며 충고한다. 불안이 꺼내는 잔소리에 사랑의 욕구는 마음속 어딘가를 배회하며 "존중받고 싶다"는 혼잣말을 질러댄다. 사랑에 대한 갈망이 점점 커질수록 불안의 횡포도 덩달아 커지는 셈이다.
하지만 어색한 문장을 시작으로 두 권의 책을 출간하게 된 나는 깨달았다. 먼저 불안이 건네는 충고는 어느 정도 일리가 있다. 나를 알거나 모르는 사람들이 내 글을 읽고 나에 대해 오해한다면, 그들이 한 오해를 내가 알게 된다면 이는 분명 끔찍할 것이다. 글은 완성된 형태로 자신의 생각을 전달하는 도구이다. 대화처럼 만회할 수 있는 기회가 없다. 읽게 될 사람들을 크게 의식하며 적어야 하므로 조심스러운 자세는 분명 필요하다. 마찬가지로 사랑에 대한 욕구도 일리가 있다.
사람들과 친밀한 관계를 잘 형성하지 못했던 때에 글을 쓰고 공개하기 시작했다. 내 글을 읽은 누군가가 "저도 비슷한 경험이 있어요" 혹은 "위로받았어요" 같은 반응을 해주기를 기대하는 마음이었다. 글쓰기는 사랑받고 싶다는 내 마음을 반영한 구체적인 행동이었다. 이처럼 나는 사랑을 받기 위해 불안을 감수한 적이 있었다. 느껴지는 불안을 회피하거나 거부하지 않고 고스란히 경험하면서 글을 써나갔다. 사람들의 반응을 의식하며 느꼈던 불안이 과도한 적은 있었지만, 때로는 더 큰 사랑을 기대하게 만들었지만, 나에게 불안과 사랑이라는 두 감정은 모두 옳았다.
그렇지만 불안을 완전히 극복했다고 표현할 수는 없다. 여전히 불안한 상황이 생기면 얼음이라도 된 것처럼 그 자리에서 굳게 된다. 이윽고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땀이 큰일 났다고 지각하는 나의 상태를 설명한다. 그런 순간이 찾아오면 우선 심호흡을 하며 내면에서 요동치는 불안을 가만히 느껴본다. 불안한 상태에서 서둘러 벗어나려 애를 쓸수록 불안을 일으키는 상황에 집착하게 된다. 나는 '내가 지금 불안하구나' 하며 마음에게 말을 건다. 불안한 상태에 대해 알아주기 위해 노력하면서, 그 이후의 과정은 마음에게 묻는다. 조카들의 도전 정신과 나의 글쓰기 과정을 온전히 지켜본 마음은 불안 너머에 있는 사랑을 이제 알아주는 듯하다. 그가 나에게 건네는 속삭임이 들린다. '에이, 몰라 몰라. 실패하면 좀 어때. 일단 저질러보자'
"어어, 얘들아 위험해"
"따끼, 뭐해 빨리 와"
"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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