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집: 갱스터 랩은 힙합 정신을 망쳤을까
힙합과 범죄 또는 힙합과 폭력성의 관계는 힙합 안팎에서 끊이지 않는 논쟁거리다. 힙합의 부정적인 모습이 거론될 때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 책임을 갱스터 랩에 돌리곤 한다. 그리고 갱스터 랩은 실제로 폭력적인 것들을 노래했다. 그런데 모순적이게도, 갱스터 랩이 장악한 90년대 초중반은 그 유명한 투팍과 비기가 견인한 절정의 황금기였다. 힙합의 영광의 시기이자 아킬레스건이기도 한 이 시류의 진짜 모습은 어느 쪽일까. 이를 객관적으로 보기 위해서는 음악 이외의 것들에 눈을 돌릴 필요가 있다.
15. 크랙 에피데믹
먼저 명확히 짚어두어야 할 것이 있다. 갱스터 랩은 범죄와 폭력, 마약, 그리고 섹스에 대해 노골적으로 노래한 것이 사실이다. 뮤지션들은 총을 들고 다녔고, 폭력과 성폭력, 마약 사건에 이름을 올렸으며, 누군가는 총에 맞아 죽었다. 이것이 향후 힙합계나 미국 사회에 어떤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했다는 데에 절대적으로 반대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의 말은 신뢰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런 무법의 실태는 힙합의 거리에 만연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인과를 왜곡해서는 안 된다. 갱스터 랩이 거리를 그렇게 만든 것이 아니라, 그렇게 만들어진 거리에서 갱스터 랩이 탄생한 것이기 때문이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신종 코카인 '크랙'과 이를 규제했던 '100대 1 원칙'이다.
'크랙(crack)'은 '크랙 코카인(crack cocaine)'을 뜻하는 말로, 분말이 아닌 고체 형태로 유통되는 코카인을 말한다. 크랙은 1980년대 마약 시장의 커다란 변화와 함께 등장했다. 우선 이 시기에 마이애미를 통해 미국으로 대량의 코카인이 유입되면서 물량은 증가하고 가격은 하락했다. 낮아진 가격만큼 가난한 사람들에게의 접근성도 높아졌는데, 빈민층이 코카인의 주요 고객이 되면서 더 싼 값에 생산할 수 있는 보급형 코카인이 등장하게 된다. 기존의 분말 코카인보다 가공이 용이하고 더 경제적인 고체 형태의 코카인, 즉 크랙 코카인이었다.
마치 유행성 전염병(epidemic)처럼 퍼져나간 크랙 문제는 언론에 의해 '크랙 에피데믹(crack epidemic)'이라 불렸다. 크랙이 확산된 곳은 주로 빈민가, 그중에서도 가장 치안이 취약한 흑인 게토였는데, 이유는 그들에게 이 값싼 크랙이 지옥 같은 현실을 잊게 해주는 피난처이자 신분 상승을 가능케 하는 거의 유일한 돌파구였기 때문이다(큰돈을 버는 데에 마약상만큼 확실한 것이 없었다). 게다가 레이건 정부가 경기 침체를 극복하기 위해 복지 예산을 대폭 삭감하면서 빈민가는 더욱 정책의 사각지대로 쫓겨났다. 거리에서는 마약과 마약을 유통하는 갱단들이 밀려오는 한편, 정부로부터의 복지는 차단당한 것이다. 그리고 1986년 다음과 같은 법이 제정됐다.
'100대 1 원칙'이라고 불린 이 연방법은 크랙 코카인이 분말 코카인보다 더 해롭다는 것을 전제로 만들어졌다. 실제로 크랙은 (모든 상품이 질에 따라 가격이 매겨지듯) 분말에 비해 더 조악하고 자극적이며 중독성이 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문제가 된 것은 '100대 1'이라는 비율이었다. 이 비율은 형량의 수준을 정할 때 기준이 되는 크랙과 분말의 양적 비율을 뜻하는 것으로, 같은 형량을 기준으로 분말 코카인은 크랙의 100배가 적발되어야 함을 말한다. 무려 100배! 예를 들어 처벌이 가해지는 크랙 코카인의 양적 기준이 5g이라면, 분말의 경우는 500g이 적발되어야 같은 형량을 받았다. 그리고 앞서 말했듯 값싼 크랙 코카인의 주요 고객은 게토 흑인들이었다. 게토에서는 크랙 몇 그램만 소지해도 감옥에 갔지만, 도시에서는 그 수십 배의 분말을 갖고 있어도 복지 프로그램을 이수하는 게 전부였던 것이다. 마약 단속으로 붙잡힌 이들은 당연히 대부분 흑인이었다. 이는 사회 정의를 실현한다는 명분으로 국가가 나서서 인종차별을 한 것이나 다름없었다(해당 법은 오바마 정부 때 18대 1의 비율로 완화됐다).
이미 법이 흑인 게토를 표적으로 삼고 있었기 때문에 공권력이 이들을 대하는 태도는 더 차별적일 수밖에 없었다. 실상 마약범죄로 인해 가장 고통받는 것은 같은 게토에 살고 있는 선량한 흑인들임에도, 이들은 항상 잠재적인 범죄자 취급을 받아야만 했다. 잘못하지 않은 사람들이 길거리에서 억압을 받고 포박당했다. 바깥에 나가면 갱에게 총을 맞을까 봐 두렵지만 그 갱으로부터 지켜줘야 할 경찰마저도 나를 윽박지르는 것이 게토의 삶이었다. 게토는 미국 사회에서 점점 더 소외와 차별의 굴레로 빠졌는데, 그럴수록 더 많은 흑인들이 갱스터로서의 정체성에 공감하기 시작했다. 크랙 에피데믹이 마약과 동시에 전염시킨 강력한 반항의 문화, 그런 토대 위에서 갱스터 랩이 발전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