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지막한 오후, 우편함을 열어 본 남편이 딸아이에게 흰색의 작은 꼬질꼬질해 보이는 봉투 하나를 건넸다. 코로나로 인해 잦아진 온라인 쇼핑에 택배기사가 우리 집을 자주 찾아온다. 스트레스를 쇼핑으로 푸는 건 아닐까 하는 노파심에 다소 볼멘소리로 딸에게 한마디를 하고 말았다. “어머 뭘 또 산거야? 꽤 작은 걸 보니 이번엔 액세서리야?”
눈치가 빠른 딸은 “엄마 아니거든, 최근에 이렇게 작은 거 산 적 없는데.. 도대체 뭐지? 혹시 이상한 걸까?”하며 의심의 눈초리로 이리저리 봉투를 뜯어보더니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선 한참을 멈칫했다. “오 마이 갓! 진짜 보냈네.. 어머어머.” 그녀의 손이 바빠지기 시작했다.
우리 가족은 궁금증이 증폭되어 그 자리에 앉아서 험난한 여정을 한 듯 때가 탄 편지봉투를 뜯는 설렘에 몰두하고 있었다.
딸은 조심스레 편지봉투를 열더니 뭔가를 하나하나 꺼내기 시작했다. 펜으로 꼭꼭 눌러쓴 손편지를 제일 먼저 꺼내고 귀여운 곰돌이 초콜릿, 자그마한 실버 펜던트와 마음에 평화를 주는 예쁜 그림 한 장을 아주 살살 꺼냈다. 마치 소중한 선물을 열듯 그녀의 자세는 꽤 진지해 보였다.
“엄마, 몇 달전쯤 인스타에서 만난 친구가 보낸 거야. 설마 했는데 진짜 보냈어.. 체코에 산다고 하던데..”
딸아이는 요즘 대학생들도 코로나 때문에 힘들고 지쳐서 펜팔의 추억을 만드는 일이 종종 생긴다고 얘기했다. 꼼꼼히 그 친구의 편지를 읽고 나서는 뭔가 감동의 쓰나미가 지나간 듯 두 볼이 발그래해졌다.
“ 엄마, 그런데 이런 편지 받아본지가 얼마인지.. 초등학교 때 받아보고 처음인걸. 거의 한 달은 걸려서 온듯해! 너무 감동인데.. 체코 작은 시골마을에 산데. 나보다 한 살 어린 여자친구인데 대학에서 한국어를 교양으로 배우고 고양이도 키우고 ㅎㅎ.” 그 친구 소개에 신이 나 있었다. “나중에 유럽에 놀러 가면 만나면 좋겠다..” 잔뜩 기대에 부풀어 미래의 여행까지 상상해보는 딸아이가 귀엽기도 하고 또 내심 부럽기도 했다.
“나는 뭐라고 쓰지? 우리 윈스턴은 어떻게 그려줄까? 펜으로 그릴까? 체코 사람들은 어떤 걸 좋아할까?” 답장을 써 줄 생각에 한껏 들떠서 예쁜 편지지를 찾으러 자기 방으로 분주하게 들어갔다.
우리 집으로 날아온 손편지 한 장에 내 맘은 푸근해졌다. 정성스러운 편지를 받은 마음에 나까지 행복해지는 이 느낌…
요즘 코로나 시국에 매일 듣는 말은 비대면, 마스크, 사회적 거리두기를 생각하고만 살다가 뭔가 잊고 있었던 따뜻한 소통을 본 듯했다. 분명 시간도 걸리고 수고도 들지만 펜팔이라는 물리적인 거리에서 느끼는 여유 즉, 사람에게 천천히 다가가고 그걸 기다려주는 미덕, 그런 것들이 펜팔 친구의 힘이 아닐까 다시 한번 생각해봤다.
오늘 지구 저 먼 곳에 날아온 딸아이 펜팔 친구의 편지 한 통에 예전 수줍던 내 마음이 잠시 불리어졌다.
소통의 언어들이 점점 짧아지고 하물며 이모티콘 하나면 복잡한 감정이 전달되는 지금, 어쩌면 꽤 오랫동안 조심스레 사람에게 다가가는 방법을 우리는 잊고 있지는 않았는지… 하얀 편지지 위에 감정이 흐르는 시간들이 그립다!
사진출처:픽사 베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