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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패딩턴 Oct 31. 2020

쪼리 슬리퍼의 품격

건조하고 더운 호주의 여름에는 꼭 갖고 있어야 하는 신발 아이템이 있다. 쪼리 슬리퍼다. 여름에 호주에 온다면, 너도 나도 발가락에 걸친 쪼리 슬리퍼를 많이 보게 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쪼리 슬리퍼에 많은 시선을 뺏겨 본 적이 없었다. 시원하게 보인다는 거 빼고는 좀 없어 보인다는 편견이 더 앞섰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그 슬리퍼를 신고선 외출을 한다는 것을 상상해 본 적도 없다. 만약에 쪼리 슬리퍼를 실수로 신고 나가게 되는 일이 생긴다면, 아마 곧바로 신발가게로 달려가고 있을 것이다.


더운 여름에도 외출을 한다면 화장, 옷 게다가 신발까지 마무리되어야 발걸음이 가벼웠다. 신발은 구두나 플랫슈즈를 신고 다녔다. 편하기도 하고 옷차림과 어울리면서 교양도 챙겨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찾아간 백화점이며, 쇼핑센터에서는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쪼리를 신고 있었다. 무심하게 발가락을 드러낸 채 잰걸음으로 바삐 다녔다. 한껏 멋을 부린 쪼리 신은 멋쟁이들도 꽤 많이 보였다. 쪼리 신은 사람들을 보면 처음에는 게으르다고 생각했고 두 번째는 용감하다고 생각했다. 버젓하게 옷을 입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봐도 발에 쪼리 슬리퍼만 보이면 영 석연치 않아 보인 이유는 무엇일까? 왜 쪼리 슬리퍼를 보는 것도 신는 것도 부끄럽고 힘들어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 한편에서는 사회적 시선을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그들처럼 발에 툭 끼고 이곳에 오고 싶었다. 이 더운 여름, 내가 편하고 시원하면 그만이라는 내 생각만 하고 싶었던 거다.


나한테 푸대접을 받던 쪼리 슬리퍼는 여름만 되면 그 어떤 예쁜 구두나 샌들보다 많이 애용된다. 신발가게에는 쪼리 슬리퍼들이 줄줄이 나와 새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 다양한 색상과 디자인에 가볍고 신으면 편하고 게다가 비교적 저렴하니 쉽게 손이 갈 수밖에 없다. 길거리를 다니다 갑자기 소나기를 만나도 문제없다. 그래서 나도 반짝이는 펜던트가 붙은 예쁜 쪼리 슬리퍼를 사게 되었고 여기저기 소심하게 신고 다녔다. 어색한 발가락이 수줍어했지만 그리 편할 수가 없었다. 쪼리 슬리퍼를 신으니 옷차림도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반바지나  청바지 혹은 원피스 하나 달랑 입어도 어울리고  심지어 롱 드레스까지 소화해냈다. 쪼리는 상대적으로 소박하게 생겼으니 여름옷을 살려주면서 은근 패션의 완성을 만들었다.

내가 처음 산 오래된 쪼리 슬리퍼

가볍고, 편하고 값싼 쪼리 슬리퍼는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다 사랑받는다. 고무바닥에 연결된 단 두줄이 쪼리 슬리퍼의 메커니즘이지만, 참 무난하게 여기저기 잘 어울린다. 그 편한 쪼리 슬리퍼를 신고 어디든지 누빌 수 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상식적인 TPO(Time/Place/Occasion)를 지키면서 쪼리 슬리퍼를 신을 수 있는 배짱도 살짝 끼워 넣는 여유를 부려보면 어떨까 한다. 허접할 것이라는 편견으로부터 벗어난다면 어쩜 쪼리 한 켤레가 당신에게 여름의 색다른 추억을 가져다줄 수 있을 것이다.


요즘은 럭셔리 브랜드에서도 쪼리 슬리퍼를 만들어낸다. 상당히 고가에 팔리고 있지만, 아울러 쪼리 슬리퍼의 위상도 조금 상승하고 있다. 이제 쪼리 슬리퍼를 신고 여기저기 가보자. 백화점에도 가보고, 멋진 식당에서 브런치도 먹고, 또 럭셔리 브랜드 샵에도 한번 들어가 보자. 누군가 지정해놓은 TPO에 얽매이지 말고 편하게 다녀보자.


여기는 여름이 성큼성큼 오고 있다. 지난날의 망설임과 눈살이 찌푸려졌던 순간은 잊어버리고 내 쪼리 슬리퍼에게 당당함이란 품격을 선사해주겠다.

쪼리 슬리퍼의 영어 표현: Flip flops/ Thongs


사진출처:핀터레스트/픽사 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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