핫 플러쉬(Hot Flush)
지지난 겨울은 꽤나 추웠던 것으로 기억된다. 두꺼운 패딩을 입고 시내에 나갈 일이 있어 지하철에 올랐다. 한 30여분 정도 지났을까 갑자기 등 쪽에서 후끈거리며 열감을 느꼈다. 처음에는 옷을 많이 껴 입어서 그렇다고 여겼다. 그날의 갑작스러운 열감을 까맣게 잊은 채, 며칠 지나지 않아서 잠을 자다가 이불을 발로 차내기 시작했다. 전기담요를 덮고 자는 차가운 날씨에 이불을 걷어차다니, 이게 뭔가 하고 곰곰이 생각했다. 그 순간 싸하게 뇌리에 스치는 게 있었다. 설마 그 덥다덥다 하는 갱년기가 시작하려나 하면서, 순간 많은 생각들이 스쳐갔다. 그리고 당황스러웠다. 마음의 준비는 되어 있지 않았고 솔직히 말하면, 두려웠다. 인생 1막의 커튼이 내려지는 느낌이랄까...
그런 나의 직감은 두 번의 계절을 지난 다음에 현실화되었다. 갱년기가 온 것이다. 그중에서 많은 여성들이 힘들어한다는 핫 플러쉬(안면홍조)인 것이다. 한동안 뜸하다가 요사이 좀 자주 덥다춥다 한다. 아무 일 없이 등에 열이 오르고 그다음에 목 뒤가 더워지며 마지막으로 얼굴이 확 뜨거워진다. 가끔 식은땀까지 난다. 원치 않는 더워짐은 삶을 불편하고 초조하게 만들었다. 예고 없이 찾아오는 열감은 항상 불청객이었다. 몸이 더웠다 추웠다를 반복하며 생체회로가 고장 난 듯 정상적이지 않게 움직였다. 생각보다 조금 이르게 찾아온둣 싶어 부랴부랴 찾아간 의사는 호르몬제 말고는 딱히 추천할 게 없다며 운동이나 열심히 하라고 했다. 게다가 그는 갱년기로 인해 올 수 있는 여러 가지 질병들을 내 앞에서 늘어놓으며 의도치 않게 겁을 주고 있었다. 오르락내리락하는 호르몬이 얄미워 죽겠지만, 내가 바둥거린다고 해결될 건 아무것도 없었다. 순리에 맞게 사는 게 인생이듯, 신체의 변화도 받아들여야 하는 게 당연한 거였다.
결혼하고 한참 바쁘게 일을 할 때는 친정엄마가 가끔 집에 오셔서 아이도 돌봐 주시고 식사도 준비해 주셨다. 그때 엄마는 항상 덥다 덥다 하셨던 걸로 기억한다. 저녁을 준비하시고는 같이 드시지도 못하고 항상 창문가에 앉아 계셨다. 우리가 다 먹을 때까지 창문 너머로 들어오는 바람에 더위를 식히며 앉아 계셨다. 선풍기만이 엄마를 달래 드렸던 거 같다. 그땐 아무도 엄마의 더위를, 아니 갱년기를 위로해 주지 못했다.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자연스러운 노화의 과정이라고 철없이 생각했다. 아이 키우느라 일하느라 정신없이 살면서 엄마의 갱년기를 읽지도 못한 채 지금, 나의 세월의 갱년기에 덜컥 와 버린 것이다.
나의 갱년기를 들어줄 사람은 누가 있을까? 엄마한테 이 사실을 말씀드리니 걱정이 한가득이시다. 당신이 겪은 것을 딸이 또 겪으니 얼마나 힘들까 하시며 건강 챙기라는 당부가 끊이질 않는다. 남편한테 얘기하니 위로는 해주는 데 별로 도움이 안 된다. 나처럼 더위가 온몸을 휘감았다 말았다 하는 상황을 겪어보지 않았으니, 그는 운동을 열심히 하라는 말로 위로한다. 딸한테 얘기하니, 안쓰러운 얼굴로 “엄마, 좀 맘을 편하게 먹고 릴랙스 하며 요가를 하며 지내봐.” 하며 급한 내 성격에 꽤나 맞는 말을 해 주었다. 모두 다 자기들이 할 수 있는 위로의 방식으로 갱년기인 나를 챙겨주었다. 하지만 따뜻한 위로는 위로일 뿐, 내 더위는 잘 수그러지지 않는다.
인생의 또 다른 전환점인 갱년기를 슬기롭게 보내고 싶다. 우울해하거나 반갑지 않다고 내치려 발버둥 치지 않고 그 더위와도 잘 지내보려고 한다. 물론 쉽지 않다. 가란다고 가지 않으며, 오지 말라고 해도 올 테니 말이다. 핫 플러쉬가 오면 크게 호흡하고 유유히 부채질을 한다.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이다. 통풍 잘 되는 시원한 린넨을 몸에 걸치고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잔을 두고 여유롭게 글도 쓰고 요가도 하며 지낼 것이다. 내 더위와 엎치락뒤치락할지언정, 다가오는 이번 여름을 잘 견뎌보려고 한다. 왜냐하면 이 또한 지나갈 것이기 때문이다.
내 갱년기를 우울해하거나 위로받기보다는 내 몸이 말하는 소리에 오롯이 귀를 기울이며, 수고하며 살아온 내 젊은 날들에 먼저 따뜻한 박수를 보내고 싶다.
사진출처: 픽사 베이